정원에 단풍나무 모종을 심어놓고 어영부영 5년이 흘렀다. 어느덧 어른 키보다 더 크게 자랐다.
12월로 접어들면서 잎이 다 떨어진 단풍나무에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게 더없이 쓸쓸해 보인다.
쓸쓸하다 못해 외로워 보이는 나뭇가지 꼭대기에 새 둥지가 눈에 띈다.
새가 둥지를 지은 지 오래돼서 검부러기가 바래고 낡았다.
빈 새둥지일망정 둥지가 있었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보았다.
집을 짓고 알을 낳고 부화시켜 새끼를 기르고 날아가는 동안 새가 들락거리는 낌새도 채지 못했다.
새는 보안이 FBI보다 더 철저했고 행동이 007 첩자만큼 비밀스러웠다.
단풍나무는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서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나뭇잎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으려니와 새 둥지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는 현명해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다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나는 단풍나무가 곧게 자라라고 노끈으로 묶어서 한 가닥은 서북쪽으로 당겨놓았고 다른 끈은 서쪽으로
단단하게 묶어 놓아 올곧게 자라게끔 당도리를 해놓았다. 그러면서도 새가 집을 짓는 건 보지 못했다.
새가 한 시절 다 보내고 떠나가도록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아둔했거나 새가 똑똑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새들이 사랑하고,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 다음 날려 보내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전혀 몰랐다.
가을에 빨간 단풍이 고와서 사진에 담아놓을 만큼 단풍나무를 애지중지했건만 새 둥지는 눈에 띄지 않았다.
새가 드나드는 것도 보지 못했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이 되어서야 나무에 새 둥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숨어있던 빈 새 둥지가 드러나는 순간 사랑의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흥분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이나 새나 사랑의 연을 맺고 나면 그때부터 바빠진다.
한눈팔 사이 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집도 짓고, 사랑도 나누고, 알을 낳고, 부화해서 새끼를 기른다.
먹이를 물어 나르느라고 얼마나 바빴을까?
나뭇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이뤄내야 미숀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빈 새 둥지일망정 가까이에서 실물을 대하기는 처음이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새는 생각했던 것보다 슬기로웠다.
천적의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나뭇가지 틈새에 집터를 마련하고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는지 확인해 본다.
잎이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아늑한 곳에 보금자리를 꾸리고 사랑을 나눈다.
새의 집도 여러 가지 형태인데 오늘 내가 찾아낸 새집은 컵 둥지다.
컵 둥지란 둥지가 컵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둥지는 마른풀을 포함한 유연한 재료로 만들지만, 때로는 진흙이나 침을 바르기도 했다.
재료는 모두 가볍지만 강하고 매우 유연하다. 부화 중에 열 손실을 막아주려고 둥지에 따뜻한 새털을 깔아놓았다.
자라나는 어린 새들을 둥지가 수용할 수 있게끔 스트레칭도 가능한 자료를 골라다가 집을 짓는 유연성도 보였다.
강풍에도 떨어지지 않게 나뭇가지에 든든하게 부착해 놓은 절묘한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둥지가 크지 않은 거로 봐서 작은 새 종류로 벌새, 킹넷 같은 새가 지은 집 같아 보였다.
컵 모양의 둥지를 살펴보면 둥지 벽두께, 둥지 깊이, 둥지 짜임 밀도, 단열재, 표면적, 등 여러 가지 측면을 참작해서
설계와 시공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새들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집짓기의 대공사기법을 어떻게 터득하고 어디서 배웠을까?
집을 짓기 위해 자재를 나르느라고 수백 번 오르내렸을 것이다.
쉴 새 없이, 며칠을 두고 작업을 하면서도 피곤한 줄도 몰랐을 테지. 이런 무서운 힘은 사랑 없이는 생성되는 게 아니다.
사랑을 이루고 떠난 빈 새 둥지를 보면서 두 늙은이만 남은 우리 집을 보는 것 같아 혼자 씁쓸히 웃었다.
35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오던 때도 12월이었다. 큰딸이 일곱 살, 작은딸이 다섯 살 때다.
우리 부부도 새들처럼 아이들로 인하여 얼마나 바쁘게 살았나. 사랑에 빠져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추운 밤에도 PG&E 빌(전기 가스료) 아끼느라고 히터도 틀지 못했다.
온 가족이 전기장판 하나로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도 내 집이라는 행복감에 도취해서 추운 줄도 몰랐다.
그래도 그때가 우리는 제일 행복했다.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한 다음 해 봄이었다.
뒷마당 잔디밭과 정원수 사이를 뚜렷하게 경계 짓기 위하여 1m가 좀 못 되는 폭으로 길게 콘크리트 바닥을 깔았다.
그것도 인건비 아끼느라고 나 혼자서 해치웠다.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큰딸에게 손도장을 찍게 하고 밑에는 큰딸 이름을 새겼다.
바로 옆에 작은딸도 손도장을 찍고 이름을 새겼다.
나는 기념비적 모멘텀을 만들려는 심산이었는데 큰딸이 보기에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큰딸이 장난기 섞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도장을 머리맡에 두고 잔디밭에 벌렁 누웠다.
손도장이 마치 납작한 묘비처럼.
아무리 장난으로 하는 짓이지만 나는 흉측한 느낌이 들어서 야단치고 일어나게 했다. 모두 한바탕 깔깔대고 웃었다.
그날 오후 우리는 뒷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아내는 연기가 왜 나만 따라다니느냐면서 불판을 빙빙 돌았다.
막 익어가는 불고기를 집어 먹으면서 모두 즐겁고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시원한 맥주 넘어가는 목구멍이 짜릿했다.
칠십 인생 살고 나서 알게 된 건데 그때가 우리에겐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