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이 분다.
칼바람은 면도칼로 맨살을 베는 것처럼 후비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당해보는 서울의 겨울 칼바람.
빌딩 사이 그늘진 길을 걸으면 스치고 지나가는 칼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10분 남짓 차가운 바람을 견디다 못해 햇볕 드는 쪽으로 골라가면서 걸었다.
햇볕 드는 쪽은 차갑고 날카롭던 공기가 한결 부드럽다.
마음마저 포근해진다.
가난하게 살던 어린 시절이 절로 생각난다.
그때도 추운 겨울이었다.
변변히 먹지도 못했지만 입은 옷도 궁상스러웠다.
전쟁이 막 끝난 때였으므로 물자가 부족해서 생산 시설은 가동을 멎었고
남아있던 물건을 고쳐가며 쓰던 시절이었다.
옷도 입던 옷을 기어가면서 입었고 양말도 기어가면서 신었다.
속 내의가 없는 것은 당연했고 입고 있는 옷도 홑겹이었다.
방에 불을 못 때서 방안도 싸늘했다.
방보다는 양지바른 담벼락에 서서 난로에 몸을 녹이듯 햇볕 따듯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놀기보다는 햇볕 쐬는 게 더 행복했다.
행복한 시간을 길게 늘여가고 싶어서 도망가는 햇볕을 따라다니면서 담벼락을 옮겨 다녔다.
태양의 따스함을 화롯불 쪼이듯 즐겼다.
햇볕 따스한 길을 걸으며 생각나는 옛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그때 같이 놀던 동무가 그립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추억인가.
춥고 가난했어도 즐거운 시간이 있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두툼한 점퍼에 파커 모자를 뒤집어쓰고 칼바람 부는 길을 걸으며 옛일을 떠올린다.
행복했던 시절을 불러오는 칼바람은 또 얼마나 고마운가.
어둠을 지나온 새벽에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며 피어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밤새 맹위를 떨친 칼바람은 유리창에 살얼음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살얼음 낀 유리가 평생 안 녹을 것처럼 단단해 보인다.
감히 누가 칼바람의 결연한 각오를 무너트릴 엄두라도 낼 수 있겠는가.
칼바람은 어두운 밤을 다스리는 네로 황제의 기마병처럼 보였다.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칼바람도 멀리서 희미한 빛을 안고 솟아오르는 태양 앞에서
일순간에 맥없이 사그라든다.
무너지는 살얼음이 네로 황제의 최후처럼 가련하다.
살얼음은 미쳐 온전한 태양의 모습을 보기도 전에 제풀에 놀라 스르르 녹아내린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것처럼 기마병을 거닐고 활개 치던 칼바람이었건만
미미한 태양의 얼굴만 보아도 겁먹고 달아나는 칼바람이 비루해 보인다.
행복과 불행은 햇볕과 칼바람 같아서 쫓고 쫓기는 것 같다.
칼바람을 피해 햇볕을 따라다니면서 한가지 깨달았는데
태양은 희망이고 칼바람은 고생인데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