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겪어본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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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당선인이 수유리 4.19 기념탑에 헌화하는 바람에 오늘이 4.19인 줄 알았다.

그동안 5.18 민주화운동에 밀려 4.19는 잊고 살았다.

화면으로나마 4.19 묘역에 말없이 누워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진정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5.18처럼 분노에 찬 군중이 무기고를 털어서 무기를 들고나온 것도 아니고

경찰이나 군인들과 싸우겠다고 외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맨주먹으로 부정 선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애끓는 심정을 호소하는 순수한 데모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분들은 참으로 고귀한 분들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1960419일은 날씨가 화창한 봄날이었다.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다. 나는 외사촌 누님의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집이 한강 건너 상도동이었는데 그 전날, 418일에 고대생들이 데모하고 돌아가다가

종로에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뉴스가 아침 내내 흘러나왔다.

평상시처럼 학교에 갔는데 뒤숭숭한 분위기만 맴돌 뿐 수업은 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선생님들은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운동장으로 나가야 하는 건지 교실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건지 아무도 모르고

누군가 짧은 뉴스를 들고 오면 모두 모여들어 귀를 기울였다.

어수선하고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어느 학교가 이미 나갔다느니, 대기 중이라느니, 별별 소리가 다 들렸다.

오전 내내 수업도 없이 점심시간이 되자 오늘은 수업이 없다면서 집으로 가라도 했다.

학교가 일찌감치 파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한눈팔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얼씨구나하고 시내버스를 타러 나갔다.

하지만 버스는 다니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지 않은 게 아니라 시내에 길이 막혀서 버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는 형국이었다. 할 수 없이 종로 5가까지 걸어갔다.

종로 5가에서 전차를 탈 생각이었다. 그러나 종로 5가에는 사람들이 길에 꽉 차 있어서

전차고 버스고 다니지 못했다. 종로 5가 사거리 코너에 파출소가 있는데 학생들이

파출소에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고 2층에서 물건들을 창밖으로 내동댕이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존재감 없는 학생이어서 집으로 가야 하는데 버스가 없으니 걸어갈 수도 없고

정말 난감했다. 종로는 데모 인파로 미어졌는데 을지로는 그런대로 비어있었다.

걸어서 을지로로 갔다. 용산 가는 버스가 있기에 우선 타고 봤다.

 

그날 밤 뉴스에 전국 휴교령이 내렸다.

학교에 안 가고 노는 날이 계속됐다. 그때는 전화도 귀한 시절이어서 전화 있는 집이 없었다.

일주일을 집에서 놀다가 당시 광화문 도렴동이 집인 친구를 찾아갔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도 데모가 이어졌는데 이기붕 부통령 집을 털러 갔다나 부수러

갔다나 하는 바람에 친구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를 더 놀았는지 모른다.

 

등교했더니 동창 중의 한 명은 경찰이 쏜 총에 복부를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앉았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또 다른 동창도 총에 맞아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 입원했던 친구는 얼마 후에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총에 맞아 죽은 친구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 친구의 어머니가 하교 시간이면 학교 뒷문에 와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와서 기다렸다. “영근아! 영근아!”하면서…….

그 친구 이름이 송영근이다.

학교에 그 친구의 기념비를 세웠고 4.19가 되면 기념행사를 그 기념비 앞에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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