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인권운동가인 여대생 박연미(22)씨가 시애틀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북한 인권문제와
탈북자들에 대해 한인들과 미국인들이 큰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국제적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규탄하고 있는 미모의 탈북 여대생으로 유명한 그녀는
2007년 탈북 해 동국대학교에 다니다 이번에 콜럼비아 대학에서 공부 중이다.
이날 박연미씨는 2015년에 발간한 자서전
‘In Order to Live a North Korean girl’s Journey to Freedom‘ (한국어 판: 내가 본 것을
당신이 알게 됐으면’)이란 주제로 자신이 겪은 북한의 처참한 실상과 인권 유린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어로 강연했다. 이어서 영어로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
그녀의 간증에 따르면 그녀는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와 언니 하나뿐인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8살 때인 2002년 당원인 아버지가 김정일 사망 후 배급이 중단되자
암시장에서 불법 장사를 하다가 수감되었다.
어머니도 조사를 받아 언니와 그녀만 집에 남게 되자 압록강 인근 산에서 풀 캐어 먹고
살았다. 아버지는 3년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16살 언니가 중국으로 먼저 떠났다.
언니가 어디 갔는지 몰랐는데 중국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13살 때
어머니와 함께 중국 브로커를 따라 압록강을 건너 탈북 했다.
중국으로 가면 밝은 세상이 오고 고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내가 14살 때 함께 중국에 온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새벽 3시에 흙에 묻었다.
첫날 중국 브로커가 어머니를 강간하는 것을 목격했다.
싫으면 북한으로 돌아가라는 브로커의 협박으로 어머니는 260달러, 나는 300달러를 브로커가
챙기고 우리를 한족에게 팔아넘겼다.
15살 때인 2009년 2월 어머니와 몽골로 갔다. 나침판, 면도칼, 독약을 지니고 죽을 각오로
고비사막을 넘었다.
2009년 4월 인천으로 들어왔다.
자유를 얻고 지옥을 벗어났는데 또 다른 지옥이 앞을 가로막았다.
북한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나 남한은 선택 자유가 있는 대신에 책임감이
따랐다. 피나는 노력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등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탈북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수치스러워서 신분을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013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2014 젊은 지도자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고
회의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결코 정의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젠 탈북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박연미씨는 할한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닫혀 있는 나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통행증이 없으면
이웃동네도 갈수 없을 정도로 자유가 없는 나라였으나 가장 잘 사는 나라일 정도로
세뇌 교육을 당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불평도 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독재 정권만 아니라면 정든 고향과 사람들이 있어서 항상 가고 싶고 가슴에
남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박연미씨는 이 자리에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며 북한 인권과 중국 탈북자 문제에
언론과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미디어들은 지난번 북한 수소폭탄과
김정은을 우스꽝스럽게 만든 영화에나 관심을 기우리지 말고 이제는 사실 이슈를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중국은 수만 명의 탈북자들을 불법으로 북한에 돌려보내고 있고
10~13세 어린이들이 200~300달러에 팔려간다”며 자신도 “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를 죽여도 아무도 신고할 사람이 없다”고 협박을 당했다고 눈물지었다.
박연미씨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은 죽어도 신고할 사람이 없다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도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북한에서 살 때는 빵이 가득한 바케스 하나를 얻는 것이 꿈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이 꿈이 이뤄졌지만 행복하지 않았다”며 인간은 존엄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남북한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연미씨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열린 ‘2014 젊은 지도자 회의‘에서 연설 후 유명해
졌다. 당시 190여 개국 18~30세 젊은이 1300여 명이 참석했고 30명의 연사가 의견을
발표했는데 탈북 여대생 박연미씨 가 눈물을 흘리며 북한 인권 참상을 알렸다.
특히 중국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대신해 탈북을 돕는 브로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대목에서
눈물 섞인 증언으로 충격을 주었다.
이 회의를 시작으로 ‘국제 인권회의‘, ‘제6차 세계여성정상회의‘ 등에 참석하며
북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TV에 출연하고 워싱턴포스트에 ‘북한 암시장 세대의 희망’이라는
글을 기고하는 등 세계를 무대로 북한 인권 관련 증언과 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 정책
중단 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녀는 영국 BBC방송이 선정한 ‘올해의 세계 100대 여성‘에
선정된 바 있다.
이처럼 박연미씨의 영향력이 커지자 북한 측에서는 대남선전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박연미씨의 친인척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출연시켜
‘인권 모략극의 꼭두각시 박연미’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올리며 박씨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북한의 압력에도 지난해 책을 발간한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북한의 참상,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탈북자의 비참한 삶을 그렸다.
미국에서는 시애틀이 처음 하는 한국어 강연이라는 그녀는 중국 암시장의 DVD를 통해
한국 드라마와 외국 영화도 보았는데 타이타닉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이성간의 사랑으로
죽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주체사상의 북한은 사랑이나 영화, 노래 모두가
정권을 위해 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