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게 아주 오래전의 여행이었다.
나와 아내가 젊었을 때의 어느 날이었으니.
유명한 트라팔가 투어(Trafalgar Tours)을 통해서 16일간 유럽을 다녀왔다.
로마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플로렌스를 거처 알프스산맥을 넘고 스위스로 해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로 향했다.
지금도 몇 가지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파리에서의 일이다.
그룹이라고 해봐야 열댓 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의사 부부와 아이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흑인 부부,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할머니 두 분.
그날 저녁은 샹데리에 거리를 여행하고 밤에 캉캉 쇼를 보는 거로 되어 있었다.
시카고에서 온 노인 부부는 나가지 않고 방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고단해서 따라다니기 싫단다.
팔순을 넘긴 할머니들은 가는 곳마다 호텔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젊었으니까 노인들이 방에만 머물러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싼 돈 내고 와서 왜 호텔 방에만 있는지. 내가 늙어보니 알 것 같다.
특별히 궁금한 것도 없고 보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방에 누워있는 게 편하다.
우리 투어 가이드가 영국인 테일러라고 하는 친구였는데 늘 버버리 코트에 긴 우산을
지팡이 삼아 들고 다니던 친구였다.
영국인 신사여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그가 나서서 이야기하면 잘 통했다.
로마에서 시스틴 채플을 들어가려고 줄을 길게 늘어서 있는 관광객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우리는 줄도 서지 않고 그냥 통과해서 들어갔다.
천장 화를 보려면 입장 인원이 제한되기 때문에 반나절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 줄도 서지 않고 들어가자니 뒤통수가 근지러웠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어서 투어 가이드의 설명만 듣고 건성 보고 넘긴 게 아쉽다.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느라고 고개가 아팠던 생각이 난다.
파리에서 캉캉 쇼를 보는데도 사회자가 특별히 우리 부부를 무대 위로 불러내서
이것저것 웃기는 질문을 해댔다.
사회자가 관객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한국에 대해서 짓궂은 질문을 하면
나는 미국인이어서 한국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미국에 대해서 짓궂은 질문을 하면 나는 한국인이어서 미국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결국 웃자는 것이니 너도나도 모두 웃겼다.
짐작하건대 영국인 투어 가이드가 특별히 사회자에게 부탁해서 우리 부부를 무대로
불러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만든 (Pieta-1499) 피에타 “애도”
로마의 St. Pietro 바티칸에 들어서면 오른편 벽에 조각상이 있다.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다. 한 덩어리의 대리석으로 조각했다.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작품이다.
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해서 서명하지 않았다.
이 작품을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른 장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보고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남겼다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대표 작품이다.
르네상스를 탄생시킨 피렌체 시청 광장에 있는 David 1504년 작
성경에 나오는 소년 다윗을 뻥튀기기 해서 우람한 청년으로 표현한 작품.
예술은 거짓말이다. 예술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다윗은 근육이 단단한 청년으로 탄탄한 몸집을 갖고
있음으로서 골리앗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원래 이 조각상은 청사 건물 맨 위에다가 세우려고 주문했으나 제작해 놓고 보니
너무 크고 무거워서 광장에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
조각상이 약간 가분수에다가 손이 너무 크게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청사 건물 위에 세웠을 경우 올려다봐야 하는데 손과 머리를
조금 크게 함으로서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Interior of the Sistine Chapel(1475-83, 1508-12, 1535-41) Vatican
1475-83 다른 화가들이 벽화를 그렸다.
1508-12 미켈란젤로가 천장의 ‘아담의 창조’를 그렸다.
1535-41 뒷벽의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조각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미켈란젤로를 교황이 불러서 시스틴 기도실의 천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미켈란젤로는 여러 번 거절했다.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교황이 미켈란젤로를 설득해서 천장 그림을 그리게 했다.
후일 벽화도 그리게 되는 데 이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미켈란젤로를 조각가에서 화가의 길을 걷게 만든 사건이다.
미켈란젤로는 제작을 맞으면서 조건을 내 세운다.
조건으로 “내가 완성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그림을 봐서는 안 된다”
천장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입체적인 디자인과 조각으로 형상화 해 놓았다.
살아있는 모습들을 그려놓음으로서 생동하는 그림이다.
가장 유명한 ‘천지창조’가 있다.
신이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
검지가 접촉하는 장면을 창조해 냈다. 인간과 신의 만남을 나타내고 있다.
최후의 심판
심판의 날이 오면 중앙에 예수가 있고 하늘에는 천사들이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
맨 밑의 왼쪽 무덤에서 살아나 부활하는 장면이고 오른 쪽은 지옥을 그리고 있다.
최후의 심판 역시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생동감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