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인데도 하늘에 먹구름이 짓누르고 있어서 어둡기가 한밤중 같다.
집 안에 불이란 불은 다 켰다.
지난밤에 내리던 비가 날이 밝았는데도 비실비실 그칠 줄 모른다.
오늘은 온종일 비가 올 모양이다.
KBS <다큐 공감>을 보다가 깜박 졸고 났더니 해가 반짝 나 있다.
벌써 오후도 한참 지나 저녁으로 치닫는다.
찬란한 햇살이 아까워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걷기로 했다.
해가 눈부시게 쏟아진다. 선글라스를 꼈다. 모처럼 긴 코스를 선택했다.
적어도 한 시간 반은 걸어야 하는 코스다.
바람이 산들산들 분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걸어가면서 이태준의 「돌다리」를 듣는다.
1930년에 쓴 소설인데 지금 들어도 현실감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과 다른 점은 클래식은 유행을 타지 않고 언제 들어도
좋은 음악이라는 점이다.
이태준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게 고전에 속한다.
언덕 위에 다다르자 샌프란시스코 항만 전경이 펼쳐진다.
오른쪽 나무 옆 먼 곳의 빌딩 숲이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이다.
왼편 오클랜드 공항 활주에 착륙하는 항공기가 조용히 그것도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는 모습이 지극히 평화롭다.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다. ‘언제 비가 왔더냐?’ 싶다.
하늘에다가 대고 ‘아침에는 왜 빗발을 날렸느냐’고 따질 수도 없다.
매일 밟는 땅의 일도 모르는데 하물며 하늘이 하는 일이야…….
살다 보니 내 인생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 있다.
어려서는 그렇게도 무서웠던 죽음이 서서히 친근하게 다가온다.
죽는다는 게 별것이더냐, 하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지.
유방암으로 10년도 넘게 고생하시던 작은 누님도 하늘 문으로 들어가셨는데.
꽃 피는 봄에 죽었으면 좋겠다더니 라일락 만발한 봄날 가셨다.
오늘따라 가을 하늘이 더없이 맑고 깨끗하다.
나는 청명한 가을날, 하늘 문을 열고 들어서고 싶다.
가서 하늘나라에 먼저 간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만나면 보나마나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힐난할 게 뻔하다.
그때 말해 주리라.
세상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오래 살다 보니 늦어졌다고.
지금은 이게 보통이라고.
한마디 덧붙여 말해 주리라.
백 세까지 살다가 가라는 걸 겨우 빠져나왔노라고……
‘하늘 문’이라는 글을 이종사촌 누님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나보다 더 카톡에 열심인 이종사촌 누님이 글을 읽고 눈물겨운 사연을 보내왔다.
“아흔이 다된 이 나이에 무슨 이야기인들 못 하겠니!”
좋아하는 코스모스 한 아름 안고 ‘하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단다.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외할머니라고 했다.
막~ 6.25 전쟁이 끝난 때라서 신랑감은 모두 군인뿐이었다.
군인 상사와 맞선을 보고 결혼식을 올렸다.
부모 일찍 잃은 외손녀가 시집간다니까 불쌍하다면서 외할머니가 손수 신혼 이불을
만들어 주셨다.
신혼 첫날밤에 새 이불을 깔아놓았는데 새신랑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동안 사귄 남자를 대라는 것이다.
어리벙벙한 소리였다. 꼬치꼬치 캐묻는 새신랑이 무서웠다.
결국 새신랑은 새 이부자리에서 자고 새색시는 방바닥에서 잤다.
살면서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신랑은 의처증 환자였다.
의처증 많은 남자를 만나 방황하던 시절.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서
이모인 너의 엄마에게 하소연하러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니…….
모두 가난하게 살던 그때는 외할머니가 얼마나 고마운 줄 몰랐다.
외할머니가 먹을 게 없어서 끼니를 굶는데도 철딱서니 없는 나는
미처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세월이 흘러 살면 살수록 외할머니가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다.
이젠 다 늙었다.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외할머니다.
가난 속에서도 이불감을 마련하고 손수 신혼 이불을 만들어주셨던
외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마운 마음은 더 커만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