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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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비평?  2021년 가을호

 

포도밭 전시회 / 신재동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볼 줄은 안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읽을 줄은 안다.

 

  아침나절 걸어서 동네 한 바퀴 돌아온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늘 그래 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아내와 함께 걷는다. 아내가 다니던 피트니스 센터는 코로나19 사태로 문을 닫았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비타민D가 잘 형성된다고 한다. 해가 처음 뜬 것도 아닌데 오늘은 유난히

반갑다. 눈에 보이는 일상이 보기에 따라서는 고귀한 보석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영문도 모르고 들이닥친 코로나 팬데믹으로 걷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전에는 동네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스쳐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걷는 사람도 많고 사람마다 마스크를 걸친 얼굴이라 무섭기도 하다.

서로 몸을 피해 거리를 두고 지나치면서도 당신이 싫어서 피하는 게 아니랍니다라는 신호로

하이!’ 하며 손을 들어 인사한다. 전과 다른 인사 모습이다.

걷기 좋은 편한 길이다 싶으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나 숨을 가쁘게도 한다.

다시 평지를 걷고 또 한 차례 언덕길로 들어서면 그 길은 곧바로 작은 공원으로 이어진다.

푸른 잔디와 어린이 놀이터를 낀 공원 둘레길을 반 바퀴쯤 돌아 나와 또 오르막 내리막을 두어 차례

지난다. 아침 운동으로 짧다면 짧은 반시간 걷기지만, 아내와 나의 컨디션 유지로는 넉넉하다.

 

교외의 집들은 도시와는 다르다. 미송과 레드우드 숲속에 자리 잡은 집들은 저마다 집주인의 취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집을 또 한 채 지어도 되리만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은 집이 있는가 하면,

아담하고 예쁜 모양의 집채를 길가까지 끌어내어 지은 집도 있다.

야트막한 언덕길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자리 잡은 별장같이 생긴 2층 집은 그리 크지 않은 앞마당을

포도밭으로 꾸몄다. 싱싱한 포도나무 가지마다 청포도 송이들이 달려 있다.

집 앞에 참나무 와인 배럴스가 세워진 걸 보면 화이트와인을 담글 것으로 보인다.

언덕길 포도밭 집을 지나 한참 가다 보면 앞 정원이 넓은 집을 하나 더 만난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봄에 정원의 길가 쪽을 포도밭으로 일군 집이다.

포도나무를 세 줄로 가지런히 심은 모양새는 나파벨리 와이너리의 한 귀퉁이를 뚝 떼어다 놓은 것 같다.

이 집 앞을 지날 때면 가지마다 돋은 싹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 보기 좋게 넝쿨 망을 기어 올라가는 걸

보고 우리 집 뒷마당에도 포도나무를 심어봐?’ 하는 욕심이 일곤 한다.

 

오늘은 새 포도밭 둘레에 특별한 이벤트가 펼쳐져 있다.

포도밭은 짐승이 들어가지 못하게 철사망으로 울타리를 쳤는데, 그 울타리에 예쁜 천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조각보 이불을 널어놓았다. 첫눈에도 솜씨 있는 사람이 만든 수공예품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드문드문 널려 있는 조각보 이불이 다섯 채나 되는데 어른이 덮어도 되리만치 널찍널찍하다.

저거 파는 건가?”

그냥 구경하라는 거겠지.”

내가 탐을 내자 아내도 궁금해한다.

포도밭 안쪽 깊숙이에 자리 잡은 주인집에서는 사람 기척이 나지 않아 어디 물어볼 데도 없다.

마침 지나가다가 차를 세우고 내려온 백인 여자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뭔가 아는 듯 익숙하게 움직였다.

이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겠다 싶어서 속으로 적정한 가격을 가늠해 보며 물었다.

저거 팔려고 내놓은 이불인가요?”

아니에요, 수공예품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에요.”

백인 여자는 로컬신문에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얼마 전 집주인인 미세스 제이슨이 오클랜드 수공예품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이란다.

전시회가 끝나고 그 작품들을 가져와 자기 집 포도밭에서 오늘 하루만 전시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났다고 했다.

집주인이면서 실제로 작품을 만든 미세스 제이슨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녀가 색종이 같은 천 조각

하나하나를 정성껏 이어붙이는 모습이 영상으로 그려졌다.

한 폭, 한 폭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그 많은 천 조각들과 얼마나 뜨겁게 호흡했을까?

아내와 함께 전시된 조각보 이불을 차근차근 살펴보는 동안 어릴 때 엄마가 안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얀 이불 홑청을 새로 입히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오른손 검지에 골무를 끼고 한 땀 한 땀 떠 나가던 느리고도 긴 수공예에는 엄마의 날숨이 묻어 있었다.

 

아침 햇살 묻은 공기를 마시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포도밭 전시회 장면이 눈에 어른거린다.

미세스 제이슨의 슬기로운 행위는 코로나 팬데믹 같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위축된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녀의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되리라.

어쩌면 이런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나눔이 그동안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한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위기에서도 삶의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니었나 싶다.

인간은 이렇게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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