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아기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다.
우리는 알라메다 시의 저소득 임대 아파트 2층에서 살았다.
저녁 먹고 이웃에서 사는 형님네 집에 놀러 가려고 아기를 가벼운 담요에 싸서 안고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갑자기 아기가 눈을 까뒤집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까불러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형님네 집이고 뭐고 급히 차를 몰고 오클랜드 카이저 병원으로 달렸다.
아기의 몸에서 열이 펄펄 끓었다.
밤이 늦었기 때문에 소아과 의사는 퇴근한 후였고 간호사만 있었다.
아내는 다음 날 직장에 출근해야 해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병원에서 아기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나는 실업자였다.
그날 밤, 흑인 간호사와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매시간 아기의 체온을 재면 화씨 98도가 정상인데 아기의 체온은 100도를 넘어 102도
103도로 치달았다.
그때마다 간호사와 나는 아기를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찬물로 목욕을 시켰다.
찬물을 끼얹질 때마다 아기는 자지러들게 울었고 내게 매달려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간호사는 샤워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물을 인정사정없이 아기 온몸에 골고루 뿌려댔다.
아기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면서 내게 매달렸다.
나는 차마 더는 못 보겠기에 그만하자고 하면 간호사는 화를 내면서 아기를 죽이려는
것이냐고 야단쳤다.
15분 정도 찬물에 목욕시키고 나면 잠시나마 체온이 내려갔다.
다시 침대에 눕히고 기다렸다가 체온 재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날 밤 한잠 자지 못하고 아기 침대에 붙어 앉아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차라리 나를 아프게 하고 아기를 아픔에서 구해 달라”고.
다음 날, 소아과 의사가 아기를 보고 별별 검사를 다 했는데 병명을 알아내지 못했다.
여자 소아과 의사였는데 아기 아빠인 나를 불러서 따로 만났다.
아기 골수를 뽑아서 검사해야 하는데 동의서에 서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골수를 채취하려면 아기가 몹시 아플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길만이 병명을 정확히 알 수 있다니 거절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날 오후, 풍진(German measles)이라는 병명이 밝혀졌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커가면서 우리 부부에게 기쁨만 선사했다.
한국 전통 관습에 따르면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나는 까놓고 못난 사람이니까.
아들은 나를 닮지 않았다. 나는 눈이 작은데 아들은 눈이 헤드라이트처럼 둥글고 크다.
아들은 눈이 크고 잘생겨서 보는 사람마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고 하면서 잘생긴
아들을 부러워했다.
아들은 자라면서도 나의 속을 썩여본 일이 없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아침이면 혼자서 일어나 과제물 다 챙겨서 학교에 갔다.
아침이면 우리 부부는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들리는 소리로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
짐작하곤 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아들이 학교에 가는구나 하고 알았다.
나는 아내더러 최소한도 학교에 가는 아들을 배웅해 주는 게 엄마가 아니냐고 하면서
일어나기를 주문했으나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통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가면 아버지가 아들 자동차 운전을 가르쳐주고 운전면허
따는 것도 도와주는 게 일반적인 통과 의례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어느 날 내게 와서 운전면허도 땄으니까 학교에 몰고 갈 차를
달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운전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면허를 받았다고?
내가 몰던 작은 차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동차 사고도 없이 잘 운전하고 다녔다.
아들은 커가면서 오로지 기쁨만을 우리 부부에게 안겨 주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공부도 잘해서 UC 버클리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입학하고 1년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내가 아들에게 해 준 것은 아들이 기숙사에 들어갈 때 짐을 날라다 준 것이 전부다.
졸업 후에는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아들은 집에 들어와 살지 않았다. 집은 잠시 방문하는 게 전부였다.
독립심이 강한 아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 섭섭하기도 했다.
아들이 없는 집은 쓸쓸한 것도 같았다.
한번은 아들에게 집에서 직장에 다니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집은 아버지 집이잖아요?”라고 되묻는 아들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이 집이 우리 집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아닌 내 집이라니?
아들은 나와 너의 개념은 있어도 ‘우리’라는 개념은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모여 살면서 모든 게 우리라는 말로 통한다.
‘우리’라는 문화가 매우 발달해 있다.
우리나라 사람, 우리끼리, 우리 편, 우리 쪽으로, 우리 것 등등
우리 것은 우리 중에서 누구의 것이냐?
한국에서 자식들 사이에 상속 소송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재정기술회사 ‘스마트에셋‘(SmartAsset)이 최근 발표한 2022년 ‘미국인들이 가장 행복한
도시‘(Where Aemricans are Happiest) 순위에서 서니베일이 1위에 이름을 올렸다.
1위를 차지한 서니베일은 삶의 질 범주에서 100점을 획득했고, 웰빙 97.7점,
개인 금융 86.5점으로 총 94.7점을 기록했다.
10만달러 이상 버는 주민 비율이 62.5%로 가장 높았고, 빈곤 수준 이하로 사는
성인 주민 비율은 3번째로 가장 낮은 5%였다.
결혼률은 56.8%로 5번째로 높았으며 폭력범죄는 9번째로 낮았다.
아들이 사는 도시다.
아들은 손자들을 데리고 여행을 자주 다닌다.
자동차를 몰고 멀리 여행 다니는 아들네를 보면 내게서 보고 배운 대로 산다는 걸
알 수 있다.
인생이라는 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고대로 따라 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