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서 유명한 블로거 ’순이 이야기‘에 실렸던 글이다.
『요양병원에서 가끔 이상한 현상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연세 많고 아픈 분들이 계셔서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는 곳인데 어떤 할머니께서
이걸 예고하는 울음소리를 냅니다.
입원하신지 8년 정도 되셨는데 말씀도 못하시고 의식이 거의 없습니다.
이분이 울면 누군가 돌아가시는 일을 여러 번 목도한 직원들이 그런 예감 때문에
울음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기력이 다하여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것을 보호자분들이 다 인지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막상 죽음을 맞는 순간과 맞닥뜨리는 것은 피하고 싶어집니다.
이분이 울면 저승사자가 가까이 와 둘러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몹시 무겁고, 근무하는 내내 더 긴장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간병인이나 직원들이 모두 달려들어 우는 할머니를 달래도 보지만,
할머니는 대화가 불가능하고 무의식 속에서 그러시는 거라 아무런 방법도 소용없습니다.
이 할머니 눈에는 저승사자가 보이는 걸까요?
직원들은 할머니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분이 오셨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할머니 한 분은 저승사자와 싸우기도 합니다.
할머니는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며 허공을 향해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시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저 시커먼 놈이 나를 잡으러 와서 쫓아내느라”고 그러신다는 겁니다.
어느 땐 시커먼 사람들이 세 명도 오고 다섯 명도 왔다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저항합니다.
탁자 위의 플라스틱 로션 병이나 베이비파우더 통. 휴지 상자, 과자봉지 그런 것에 맞아서
도망갈 저승사자면 너무 귀여운 시추에이션입니다만, 실제 상황입니다.
저승사자와 싸운 흔적으로는 할머니의 몸부림과 주변에 흩어진 일상용품 정도인데
어쨌든 그렇게 저항하고 버틴 할머니는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을 뜹니다.
자주 그러셔서 할머니께 농담 삼아 부탁드립니다.
“할머니 시커먼 사람이 와서 가자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요.”
“안 따라가! 내가 소리 지르면 도망가. 내가 이겨…….”
이 할머니를 데려가려고 오는 저승사자가 유독 마음이 여린 건지,
본인이 안 가겠다고 하면 못 데리고 가는 룰이 있는 건지, 헛것이 보이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력도 없으시고, 숟가락조차 들기 힘들어 콧줄을 하고 연명하는
분인데도 잘 버티고 계십니다.』
사람은 죽고 싶어도 자력으로 죽을 수가 없다.
살아야겠다는 의지인지, 본능인지 아무튼 타고난 생존 의지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살려고
발버둥 친다. 과연 발버둥 치면서 사는 게 옳은가?
’죽고 싶어지는 약‘이라도 있으면 자신이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나.
이래서 ’죽고 싶어지는 약‘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죽고 싶어지는 약’을 커피처럼 즐기면서 마실 수 있다면 좋겠다.
첫날 1호 약을 마시면 기분이 좋고 상쾌하다. 마치 맥주 한 잔 마신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마음이 넓어진다. 노랫가락이 나오는가 하면 주머니에 있는 돈 꺼내서 선심도 쓴다.
둘째 날 2호 약을 마시면 밥맛이 사라지면서 가벼운 음료수만 찾는다.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기운이 없어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셋째 날 3호 약을 먹고
나면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기 싫다. 누워있으면 편안하고 행복하다. 아편 피운 것처럼
온 세상이 평온하고 극락 같은 기분이다. 눈도 뜨기 싫다. 그러면서 조용히 간다.
이렇게 훌륭한 약이 왜 진작에 나오지 않았나?
엉뚱하게 장수 약만 개발하다니!
내가 왜 ‘죽고 싶어지는 약’의 발명을 고대하는가 하면,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너나없이 100세를 살게 되면 그때는 이런 약이 대박 나고도 남을 것 같아서다.
불치병 같은 시한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약이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은 좋다는 건 다 먹고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친다.
장수가 뭐 대단한 벼슬이라고 TV에서 보여주고 선량한 노인들을 부추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고받은 환자도 더 살고 싶어서 애걸복걸한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지 발버둥 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문제는 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서 그럴 것이다.
말기치료가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의사만 아는 게 아니다.
지금처럼 까발려진 세상에 환자와 가족들도 다 안다. 그러면서도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고통 속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산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죽기 싫어한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죽고 싶은 마음은 ‘쪼끔‘에 불과하고
살고 싶은 마음으로 다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연수명을 전제로 하셨지 과학이 수명에 기여한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이 수명을 연장하기 전에 죽는 약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죽기는 싫어하고
더 살겠다고만 하는 게 문제다.
‘죽고 싶어지는 약’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기치료를 계속하면 삶의 질이 떨어져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엉망인 삶일지라도 일이 년 더 살아보겠다고 무서운 치료를
선택하고 만다.
살 만큼 산 노인이 병상에 누워 몇 년째 지내면서 아직도 더 살아야겠다고 삶의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이 ‘죽고 싶어지는 약’을 복용한다면 얼마나 멋진 마무리가 되겠는가?
얼마나 멋진 삶의 본보기가 되겠는가?
누구나 소원하기를 죽을 때 자는 듯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그런 좋은 바람은 아무에게나 쉽게 오지 않는다.
말로만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남은 앞날을 알 수 있을 때 ‘죽고 싶어지는 약’을 복용함으로써 삶의 마지막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죽고 싶어지는 약’을 먹고 자살하라고?
자살이라고 말하면 자살이고, 존엄사라고 말하면 존엄사이다.
죽는다고 말하면 죽는 거고, 인생 졸업이라고 말하면 졸업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답게, 양보다는 질적으로 살아보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