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집 열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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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톡에 떠다니는 글 중에 현관문 비밀번호가 같은 집의 행복이란 글을 보았다.

 

<둘째 며느리 집에 갔다가 나는 가슴 따뜻한 며느리의 마음을 느꼈다.

아파트 현관문의 비밀번호가 우리 집하고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뒷동에 사는 큰아들네도 우리 집하고 비밀번호를 똑같이 해놓았다.

엄마가 오더라도 언제라도 자유롭게 문을 열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워낙 비밀번호 외울 게 많아 헤맬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참 좋았는데, 작은 아들네도 같은 번호를 쓰는지는 몰랐었다.

그런데……. 그 사소한 것이 나를 그렇게 마음 든든하게 만들었을까?

언제 내가 가더라도 마음 놓고 문을 열 수 있게 해놓은 것.

그 마음이 어느 것보다도 기분을 좋게 했다.

 

우스갯말로 요즘 아파트 이름이 어려운 영어로 돼 있는 게 시어머니가 못 찾아오게?

그랬다는 말이 있다.

설마 그러랴 만은 아주 헛말은 아닌 듯한 생각도 든다.

결혼한 아들네 집에 가는 일. 김치를 담가서도 그냥 경비실에 맡겨두고 오는 것이 현명한

시어머니라는 말은 누가 만든 말일까?

 

그런데 엄마가 오실 때 그저 자연스럽게 엄마 사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오라고 만든 두 아들네 집 비밀번호.

그것만 생각하면 가지 않아도 든든하고 편하다.

그 건 아들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 며느리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오랫동안 떠돈 이야기라서 감동은 시들했다.

하지만 우리 애들은 어떤가 돌아보게 한다.

미국은 한국보다 디지털 문명이 더뎌서 집 문에 비밀번호가 없기도 하지만 미국인들은

아직도 열쇠를 원한다. 열쇠로 열고 드나든다.

아내는 아들네 집 열쇠를 가지고 있다. 언제든 열고 드나든다.

요새 젊은이들은 바빠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

아들 며느리 둘 다 일하고 손자들은 학교에 가고 없다.

노는 날이면 가족끼리 놀러 다녀야지 부모 집에 올 시간이 어디 있나?

설혹 아들네가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해도 부담스럽다. 귀찮은 일이다.

 

우리 부부는 보통 3주에 한 번 정도로 한국 식품점에 가는데 갈 때마다 아내는

아들네 집에 들른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러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어다 놓고 오곤 한다.

며느리도 식빵을 구워놓았다가 가져가라고 하기도 하고 일본 음식을 맛보라고

보내오기도 한다. 서로 만나지 못하는 교류이다.

 

카톡에서 글을 읽다 보면 고부간의 갈등이나 뭐 그런 글을 보는데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몫이고 아들네 삶은 아들네 몫이다.

마치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지만 어떻게 사는지 그 집안 내막은 모르는 것처럼

아들도 서로 간섭하지 않으니 신경 쓸 일도 없다.

 

큰딸네 집은 아예 문을 잠그지 않는다.

아내가 열쇠를 가지고 있어도 문이 잠겨 있지 않으니 열쇠 없이 드나든다.

낮이면 아이는 학교에 가고 어른은 일하러 간 빈집이지만 문은 안 잠겨 있다.

오히려 내가 문 좀 잠그고 다니라고 잔소리한다.

도둑 없는 동네여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다면 털려도 몇 번을 털렸을 것이다.

잠그지도 않는 집이지만 집 열쇠는 문 앞 폴치 돌맷 밑에 두는 게 일반적이다.

식구들은 어디에 열쇠가 있는지 알고 있어서 언제나 열고 드나든다.

손주 녀석도 열쇠 없이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문 앞 어디에 열쇠를 숨겨놓았는지

알기에 그곳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다.

 

한국에서 집 문 여는 비밀번호를 가르쳐준다는 건 미국에서 집 열쇠를 주는 것과 같다.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서 아들 집 열쇠를 받아들고 느끼는 반응이 서로 다르다.

한국에서는 아들과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위한 배려로 받아들인다.

미국에서는 아들과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필요에서다.

한국과 미국의 집 열쇠 문화 하나도 서로 다른 이유는 어디서 오는 걸까?

()라는 개념 때문은 아닐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효라는 개념이 남아있어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친구 간에도 무언가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실망하고 친밀감이 떨어진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렇다.

처음부터 받겠다는 기대 없이 주겠다는 배려만 있으면 누구와도 화목하고 행복하다.

 

지난번 나의 생일에 아들에게서 제 엄마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왔다.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자고도 했다.

나는 생일날 집에서 미역국을 먹는 게 더 좋다.

아무 선물도 원하는 게 없다고 전했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받고 싶은 선물도 없다.

오히려 손자들이 우리 집에 와서 절하는 바람에 절 값만 나갔다.

절 값 주는 행복도 쏠쏠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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