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The called constructor method for WP_Widget is deprecated since version 4.3.0! Use
__construct()
instead.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이집트 견문록_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내 앞 날을 예상하다. - 중동 천일야화
이집트 견문록_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내 앞 날을 예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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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보고 안찍던 셀카도 적잖게 찍었다. 허허 보여줄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2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 보여주려고 그렇게도 거울 속 내 모습 사진을 찍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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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geous 아니한 집이 카이로엔 없는가 보다. 죄다 gorgeous, awesome, cozy란 형용사를 갖다 붙여 놨다. 그건 그렇고 외국에서 집을 찾고 flatmate를 기대한다는 건 여러 즐거움 중의 하나 인 것 같다. 그래설까 18개월 동안 총 7명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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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메트로 표지판이 하늘향해 솟아 있다. 갈라베야라고 하는 아랍 전통 옷 입은할아버지.

이 곳과 저 곳을 잇는 천일야화, 카라반_돌새 노석조 ; Http://stonebir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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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9년 9월 20일. 13일 저녁에 카이로에 도착했으니 이집트유학생활 일곱 번째 아침을 맞이한 날이었다. 거리의 쓰레기마저 세심하게 쳐다볼 정도로 이집트 카이로 시내의 만물만사가 관찰과 신기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만 26년을 살다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란 땅에 떨어 졌으니 오죽했을까. 게다가 어떻게든 빨리 적응하고 이 낯설고도 흥미로운 문화를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많이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열정과 사명감까지 넘쳤으니 말이다.

카이로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묵었던 숙소는 이집트 무관으로 계셨던 소순영 대령님 댁이었다. 약 보름 동안 카이로 마아디 14번가에 있는 소대령님 빌라에서 지내면서 순조로운 이집트 적응기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매끼니 한정식으로 보잘 것 없는 유학생의 처지를 살펴 준 사모님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하다.

카이로에 도착해 일주일 동안 피라미드도 보고 이집트 국립 박물관, 카이로 구시가지, 마르 기르기스 기독교 지역, 카이로 시내를 둘러 봤다. 일주일정도 지나니 이제 메트로(지하철) 타는 것도 익숙해지고 집 찾아 가는 것도 쉬워 졌다. 이집트 화폐도 눈에 익어서 거리에서 쥬스나 빵 사먹는 것도 편해졌다. 적응하고 나서 적극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집’이었다. 계속 소대령님댁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랍어 수업이 시작하는 10월 첫째 주 이 전에는 내가 묵을 집이 필요했다.

방법은 몇 가지가 있었다. American University in Cairo, AUC의 게시판에서 flatmate를 구하는 광고를 통해서, 두번째는 한국 유학생들을 통해서. 난 우선 가능하면 한국 친구들보다는 외국인들과 생활하고 싶었다. 외국어를 공부하고자 외국에 와서 한국인과 동거동락한다는게 합당케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바라 봤다. 나의 모습을 일 분 십 분 한 시간 계속 쳐다 보았다. 그러다가 바닥에 엎드려 푸샾을 삼사십 개 하고 다시 거울을 빤히 바라 보았다. ‘석조, 넌 지금 이집트에 와 있다. 석조야 넌 지금 유학을 왔다. 석조 흥분되지 않느냐. 석조야 적극적으로 행동하자. 돌아 다니자. 말하자. 사람을 만나자.’ 나의 모습이 그렇게 낯설고도 애처롭게 보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의 대한 애정이 넘쳐 났고, 그 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찾았다.

집에서 아침을 맛있게 먹고, 카이로남쪽에 위치한 한국교민들 대다수가 사는 ‘마아디’를 벗어나 다운타운으로 메트로를 타고 이동했다. 우선 AUC에 갔다. 이집트 대학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캠퍼스 입구에서 신분증 검사를 한다. 재학생들의 경우 학생증을 보여 주면되는데, 외부인의 경우에는 사진이 있는자신을 나타 낼 수 있는증서, 카드가 필요하다. 여권, 학생카드 말이다.AUC에 들어가자 보니 왼쪽에자유게시판이 있었다. 학생들이 쪽지에 광고할 것을 적어 붙여 놓았는데, 학생 말고 외부인도 학교 허가를 받고 붙여 놓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07년 9월 당시이집트 파운드가 160원을 조금 넘는 정도 였으니만약 집세가 1000LE면 16만원 정도가 되는 셈이었다. 꽤 경제적이었다. 물론 기타 부가세, 예를 들면 물세 가스비 전기, 인터넷 사용등을 더 내야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꽤 괜찮았다.앞으로 묵어야 할, 유학할 거처를 찾는 다는 건 꽤 긴장되면서도 신나는 일이었다. 낯선 누군가와 특히 외국인과 낯선 동네에서 낯선 집에서 살아 갈 수 있다는 건 엄마아빠랑 함께 사는 집의 편안함만큼이나 설렜다.그래 설렘, 정확한 감정 표현이었다. 설렘. 기대되고 기다려지면서도 살짝 긴장 걱정 불안하기도한 부정이 아닌 복합적 감정의 미래적 상태.

근데, 거참 조건에 딱 맞는 집 찾기, 플랫 메이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예산과 달리 너무 비싼 경우가 많았고, 위치가 앞으로 공부하게 될 카이로 대학교와는 맞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매일같이 이 게시판을 기웃거리며 어설픈 영어로 전화하며 집을 알아 보았으나 정말 찾기 쉽지가 않았다.

결국 찾았지만. ^^

하루 한 두시간 집을 찾는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음 할 일을 메트로 타고 여기 저기 무작정 가보는 것이 었다. 18개월 동안 유학을 하면서 단 하루도 단 한시도 손에서 몸에서 떼어 놓지 않으려고 했던 않았던 물건 두 개는 바로 ‘카메라’와 ‘사전’이었다. 포켓 사전을 가방이 없어도 뒷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지하철 안에서 길거리에서 사람기다리며 겉표지가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들고다니며 봤다. 카메라는 루믹스 똑딱이로 아주 작으면서도 성능이 좋았는데, 대충 찍어도 낯선 풍경때문인지 다 작품 사진이 나오는 것 같아서 그리고 원체 사진을 좋아해서 혁대,벨트에 휴대용 케이스를 끼고 달아 넣고 다녔다. 사람도 찍어보고 거리도 찍어 보고 음식, 하늘 나무, 꽃, 가게 등등 피사체가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의 눈에 들어 오는 모든 사물은 남기고 싶은 애정의 피사체 그 자체 였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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