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독도서관에서
새 책 ‘어릴 적 그 책’을 가지고 북토크를 하였습니다.
사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끝물인데다가,
아침부터 어머니랑 전화통 붙들고 한바탕 싸우고 눈물바람…
감기약 기운에 기운도 없고, 정신 없어서 아침 굶고 점심도 라면으로 때우고…
‘아, 과연 내가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괜한 일을 벌인 거 아닐까..’
엄청난 걱정을 하면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봄날처럼 쾌청한 날씨!
택시 타고 가다가 차가 너무 막혀 내려서 삼청동 길을 걷다 보니
절로 마음이 가라앉더군요.
정독도서관 건물 문에 이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요.
2008년 첫 책 ‘그림이 그녀에게’ 낼 때 프로필 사진한다고 친구가 찍어준 저 사진…
지금은 저보다 늙었는데 좀 민망하더군요.
보통 새 책이 나오면 출판사에서 저자강연회를 많이 잡습니다만,
제 책은 강연을 할 만한 성격도 아니고,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에다가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므로,
그냥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딱 15명 신청받아서 티타임 형식으로 하기로 했었어요.
당첨돼 오시는 분들께,
어릴 때 정말 감명깊게 읽은 책을 가지고 오시거나,
아니면 머릿속에 생각하고 오셔서 책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눠주십사 부탁드렸고,
저 역시나 그냥 책 좋아하는 분들과 책 이야기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갔는데
그래도 떨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더군요.
토크 장소인 세미나실로 향해가는데,
제 앞에 아리땁고 훤칠한 커플이 걸어가더군요.
혹시나 저 분들이 내 책 독자?
약간 설레면서 갔는데… 세미나실을 찾아 가시는 걸 보니 맞더라고요.
저는 흥분하여 마음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미나실 문 앞에도 포스터가..
아, 떼 올 걸 그랬나봐요. 기념인데. ^^;
문을 열고 들어가서
미리 와 계신 독자들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또 긴장….. (두둥)
오후 3시 예정이었는데,
딱 정시에 시작할 것 같지 않아서
저는 일단 화장실을 다녀오기로 하였습니다.
화장실을 가려는데
복도에서 마주친 아주머니 한 분이 제게
"작가와의 대화하는 곳이 어디에요?"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앗.
제 또래 여성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지,
연세 드신 분이 올 줄은 몰랐는데…
저는 당황함과 기쁨이 섞인 마음으로 무심코
"제가 바로 그 작가입니다. 장소는 저기 있구요.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쪼르르 내려갔어요.
그리고 대망의 북토크 시작.
이런 분위기였어요.
사실 처음에는아늑학 아기자기한분위기의 카페를 빌려보려 했는데
휴일이라 쉽지가 않았고,
평일 저녁에 하면 좋겠지만 제가 직업상 그게 불가능….
약간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의외로 푹 퍼져 앉는 카페보다 약간 긴장시키는 의자에 앉은 저 분위기가 저는 더 좋더라고요.
집중도 잘 되고.
일단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책 내용을 설명하고,
제가 가지고 간 제 수집품 몇 권을 보여드리는데
왜 계속 콧물이 나오는 겁니까… ㅠㅜ
제 이야기를 하고
참석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제 친구들은 이 행사에 15명의 훈훈한 남성들이 오기를 기대하였으나..
역시나 제 생각대로 남자분은 두 분….
한 분은 커플 동반
한 분은 부부 동반..
이런 행사에 부부동반으로 오신다는 게 참 신선하면서도 좋아 보였어요.
어쨌든 이런 모임에서는
첫 발언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하잖아요.
인터넷 게시판 글에서 첫 댓글이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것처럼요.
앉은 순서대로 문가에 앉은 남자분께 첫 기회를 드렸는데
너무나 재미있으면서도 솔직하게,
"나는 솔직히 여자친구가 가자고 해서 왔다. 책 목차를 봤는데
내가 읽은 책은 하나도 없더라. 그래도 서문을 읽으면서 내가 어릴 때 읽은 책을 생각해 봤는데
전래동화 중 곤장 맞고 팔이 떨어져 없어지는(?) 이야기의 삽화가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얘기해주셔서
분위기가 확 살았어요.
저는 솔직히 ‘아무도 말 안 하면 어떡하지..’ 무척 걱정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 차례인 커플의 여자분이
본인도 책 수집을 하고 있다면서,
가지고 오신 계몽사 어린이 세계의 동화,
(제 책에도 언급되는 책입니다)
그리고 다른 소녀소설을 보여주시면서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 중
저같은 절판 아동도서 컬렉터들이 몇 분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분들끼리 책 이야기도 하고 정보 공유도 하는데,
저는 뭔가 제가 거대한 북 컬렉터 모임을 주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임에는 저와 동향인데, 저와는 세계가 너무 달라
궁금해서 오셨다는 공대 출신 여자분도 계셨고,
남편과 함께 오신 도서관 사서도 계셨어요.
어릴 때 ‘푸른 수염’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체험을 이야기해주시면서
‘푸른 수염’의 여주인공이 문을 열 때마다 긴장했던 경험을 말씀하시는데
저 역시나 조마조마해졌습니다.
모임엔 귀여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시종일관 생글대면서,
저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 어머니가 디즈니 명작동화를 반절밖에 안 사줘서
친구네 집에서 읽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신 분도 계셨는데요.
알고 봤더니 저랑 우연히 인터넷 카페에서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눴던 독자분이셨어요!
이벤트 있다는 거 알려드렸더니 당첨돼 오셨다고요.
92년생부터 고등학생 아들을 둔 아주머니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는데요.
제 왼쪽에 앉으셨던 저와 동년배의 여자분은
정말이지 컬렉터의 풍모를 풍기면서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 중 ‘돌리틀 선생님 이야기’
그리고 계몽사 ‘어린이 세계의 명작’을 리틀랜드에서
다시 발간한 책을 가지고 오셨어요.
이 전집의 특색은 이탈리아 출판사에서 공들여 그린 아름다운 삽화입니다..
참석자꼐서 ‘신데렐라’ 삽화를 보여주시자 탄성이 와르르~
그 외에도 도무지 1992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내공을 가진 분이 오셔서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고,
고등학생 아들을 둔 어머님은 "아들에게는 책을 사줘봤자 소용이 없지만 딸아이에겐
정말 유익하더라"는 말씀으로 좌중을 웃음바다에 빠뜨리셨고,
부인과 함께 오신 고등학교 교사께서는 저는 잘 모르지만,
수많은 수집가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추억의 ‘딱따구리 그레이트북스’ 이야기를 한참 하기도 하셨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책을 열심히 읽어서 이번 책보다는 제 두번째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에
더 공감하셨다는 독자도 계셨고요…
책 표지가 정해진 연유, 디자인 등에 대한 질문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수다를 쏟아놓도록 만든 건,
역시나 ‘책의 힘’이겠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같이 오려다가 남자가 없을 것 같다며 들어오길 포기(?)하신
일군의 남편들이 정독도서관 인근과 세종문화회관을 배회하고 계셨다는 이야기도
꼭 전해드리고 싶어요.
같이 오셔도 되는데… ^^;
어쨌든 분위기가 기대 이상으로 좋고,
저 자신도 너무나 즐거워서…
1시간 반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떨렸는데 나중엔 몰두해서 하나도 떨리지도 않더라는… ^^;
나중에 아트북스의 손희경 편집장님이
시간이 다 됐다고 알려주시고 나서야
저도 시간이 그렇게나 된 줄 알았으니까요.
북토크를 무사히 마치고 정독도서관을 나서면서야 비로소,
제가 이런 식으로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소모임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잊고 있었는데
대학교 때 그런 류의 수업을 꽤 들었거든요.
헤세, 괴테, 카프카 등 독일 명작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도 있었고,
그리스 희곡부터 볼테르의 ‘캉디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까지
서양문명의 중요한 순간을 짚어주는 고전들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도 있었죠…
어릴 때 무심코 읽은 책들이 지금의 제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줄 몰랐듯,
그 때 무심코 들은 수업들이 지금 이 순간에 그렇게 도움이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언젠가 제 친구가…
과거에 아무 생각없이 한 일이 현재의 나를 결정한다며,
그 사실이 참 무섭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저도 어제 그 비슷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니까,
지금 이 순간을 더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요…
귀중한 주말 시간을 내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말밖에 시간이 안 되는 저자때문에
‘주말출근’을 하신
아트북스 편집부 여러분, 문학동네 마케팅팀 과장님께도
마음 깊이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김준학
2014년 2월 21일 at 4:02 오후
서점에 갔다가 너무 반가운 이름과 책을 발견하고~ 다시 블로그에 왔습니다!
그동안 놀러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건강하게 잘지내셨죠? 새 책을 보면서 블로그에서 구경했던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나오고~너무좋았어요ㅜㅜ
정독도서관 세미나실 가끔 사용하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지 몰랐네요ㅜㅜ
다음달에 저두 정독도서관에서 북토크를 해요ㅎㅎ(그냥 소소한 독서모임)
앞으로 블로그에 자주 올게요
곽아람
2014년 2월 25일 at 8:52 오후
준학님> 완전 오래간만이에요 ^^ 정독도서관에서 독서모임도 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저도 앞으로 다시 블로그 열심히 하려고요 ^^*
헤일리
2014년 3월 13일 at 11:57 오후
안녕하세요^^ 전에 대학 합격 소식으로 인사드렸던 학생입니다. 새내기로 학교 잘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책에서도 쓰시고 윗글에서도 쓰신 독일명작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 말인데요. 혹시 <독일 명작의 이해> 수업이 아닌지요? (저런 수업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라는 건 물론 압니다만) 첫 학기에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독일명작의 이해’ 수업을 수강하는데 교수님께서 기자님의 책을 읽고 계시는 걸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가웠어요. (또 이 강좌 자체가 오래된 수업이라고 하더라구요) 아직은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새내기라서 교수님께 용기내서 여쭈어보지는 못했지만요.
제가 너무나 팬인 기자님이 예전에 들었을 수업을 제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몸에 전율이 흐를만큼 흥분됩니다! 저 북토크를 놓쳐서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리라 믿어요~ 블로그 올 때마다 새 글이 올라와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네요^^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곽아람
2014년 3월 14일 at 3:33 오후
헤일리님> 네, 맞아요. 전영애 선생님의 ‘독일명작의 수업’입니다. 저는 2001년 1학기에 그 수업을 들었어요. 정말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수업…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되어도 아직도 생각이 나는 수업이에요. 아마 헤일리님도, 나중에 제 나이가 되면, 그 수업을 들은 게 참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