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길 4 / 고려궁지,홍릉. 연무당옛터

고려궁지,홍릉.연무당옛터

강화고려궁지(高麗宮址)

인천강화군강화읍북문길42에위치하고있는강화고려궁지(高麗宮址)

고려궁지로간다기에경복궁이나덕수궁쯤으로생각의오류를범하고

무슨궁이이리휭~~할까했다.

궁이없었어요,,무슨고려궁???..하는순간앗!!!고려궁지라했지!!!ㅋ

고려궁지였던"터"로간다고했으면이해가고갔을텐데

고려궁지간다하니까궁궐이있을꺼라는착각을먼저하고간것이었다.

몽골군의침략에대항하기위해고종19년(1232년)에강화도로수도를옮기고

1234년에이곳에세운궁궐과관아건물이있었단다

39년동안사용되었고1270년몽고와의강화조약이맺어져

다시수도를옮기면서허물었단다.

누군가가하는말처럼

"붕어빵에붕어없듯이고려궁지에고려궁이없었다.".

"고려사절요"에의하면최우가이령군을동원하여이곳에궁을지으며

규모는작으나송도에있던궁궐과비슷하게만들게하고

고려궁지를포근히둘러싸안고있는듯한궁궐뒷산의이름도송악이라하였단다

아마도송악에서의왕도의제도를잊지않으려하였던것같으며

실지이북에있을고구려나고려의궁을유일하게남한에서볼수있는것은

이곳인가하는생각을했었지만남는것은없고오로지터만이있는것이아쉬웠다

드라마에서보는고려의궁궐의모습을보나했더니!!!

장각은정조가설립한왕립도서관으로개혁정책과

조선후기문화발달의기폭제역활을했다는곳으로

한양안에있는것은규장각

한양밖에있는것은외규장각이렇게두곳이있었단다’

바로이곳이그외규장각이다

1866년병인양요때프랑스가강화도에군함을이끌고침입해서

이곳에있던왕실문화기록유산인의궤류297권을약탈하고

모두불태워버린우리의치욕의상징인곳이다.

오랜동안프랑스와의반환소송으로그일부가오긴왔는데

5년마다의대여식으로부분반환이라니참으로안타깝고속상한일이다.

조선시대에도전쟁이일어나면강화도를피난지로정했었다

조선인조9년에옛고려궁터에행궁을지었으나

병자호란때청군에게함락되었었고.

그후영조45년(1769)강화유수부의건물을지었으나

병인양효때프랑수군에의해거의불타없어지고

지금은동헌과이방청만이남아있다.

지금남아있는동헌과이방청

고려고종홍릉(사적제224호)

고종의능이있다는홍릉을향해가는데

여긴완전등산길이다.가파른언덕을올라가다가

내가지은깔딱고개를넘으니능하나가나오는데

여기가고종의능???하고갸우뚱할정도로규모가작았다.

홍릉으로가파르게올라가다오른쪽으로눈에띤사당

문은굳건하게잠겨있더라도몰아쉬어지는숨한번쉬고간다하고

담장넘어로기웃거려도보았다,

혹여기가고종의제사를드리는사당일지아~~궁금해에!!!!

힘의권력자인최충헌의실권하에힘없는왕으로묘사된고종은

몽고의지배하에몽골이내린시호는충헌왕이다

몽골에충성하고헌신하라는의미로

아~굴욕적이다

고종18년밀려오는몽고를피해강화도로피신한사이에

대구부인사에있었던대장경이불타없어지는바람에

부처의힘에의지해몽골을막아내고자라는바램으로

다시팔만대장경을만들게한것이그나마고종에게있어서가장큰업적이아닐까

고종40년에이강화에서벗어나지를못하고한많은생을마감해서

그육신조차이곳에묻히게된다

홍릉으로오르는가파른언덕위에모셔진무덤은의외로

허술하였는데이때는불교의숭상으로예를갖추는것을

유교보다는간소하여무덤이화려하지않았단다

높은홍릉에서강화전체가내려다보이는곳에서

지금도송악쪽을바라보고있는한많은쉼을가지고계신듯한생각이들다

(펌)

고종은1212년(강종1년)에태자에책봉되고,이듬해강종의뒤를이어왕위에올랐다.

최씨일가의무단(武斷)정치로실권을잡지못하였으며,1258년최의(崔竩)가살해되자

김준(金俊)이실권을맡았다.

재위기간에몽골족등북방민족의침입으로고통을받았다.

1218년거란의침공을받고이를격퇴하면서몽골의침입에대하여는협약을맺었다(→강동성전투).

1225년몽골사신제구유(著古與)가귀국도중도적에게피살된것을구실로하여재침하자

강화조약을체결하였다.

각지에몽골의다루가치(達魯花赤:행정감독관)72인을두게하고,또약간의수비군을주둔케했다.

특히1231년부터여러차례에걸쳐몽골의침입을받고1232년강화도(江華)에천도하여(→강화천도),

28년간몽골에항쟁하였다.

왕의친조(親朝)와태자왕전(王倎)의볼모를조건으로강화가성립되어,

이후고려는사실상원나라의속국으로서공민왕때까지굴욕을겪었다.

1235년제3차침입을받고,1238년경주황룡사(皇龍寺)9층목탑을소각당한외에도

귀중한문화재를많이잃었다.

1252년제6차의침입을받았을때는남녀무려약2십만6천8백명의포로를내고,

태자(太子)의입조를약속하였다.이로써고려는사실상몽골에굴복했다.

1258년동북지방에쳐들어온몽고군에게조휘탁청이투항하면서

철령이북지역이몽고의쌍성총관부의지배하에놓이게되었다.

문화발전에힘써,팔만대장경을간행케하고,유학을장려하는등문화적업적을남겼다.

특히팔만대장경은원나라의침략을부처의힘으로격퇴하기위하여간행하였다.

능은강화의홍릉(洪陵)이다.

고종(高宗,1192년~1259년)은고려제23대국왕(재위:1213년~1259년)이다.

는철(皞),는천우(天祐),시호고종충헌안효대왕(高宗忠憲安孝大王).

강종과원덕태후(元德太后)유씨(柳氏)의맏아들이다.

비(妃)는희종의딸안혜태후(安惠太后)유씨(柳氏)이다.몽골에서내린시호는충헌왕(忠憲王)이다.

최충헌의적(嫡)매형이자사돈간이기도하다.

최충헌은부왕강종의서녀와재혼하였는데,아들원종의장인김약선최충헌의아들최우의사위였다.

1213년부터1259년까지재위하는동안실권을갖지못하였으며

1213년부터1219년까지최충헌(崔忠獻)이실권을맡았고

1219년부터1249년까지최이(崔怡)가실권을맡았으며

1249년부터1257년까지최항(崔沆)이실권을맡았고

1257년부터1258년까지최의(崔竩)가실권을맡았으며

1258년부터1259년까지김준(金俊)이실권을맡았다.

강화서문

고려궁터에서내려와하점리방향으로약500m진행하다보면첨화루라는서문을만날수있다.

이서문은겹처마팔짝지붕으로고목나무와더불어아름다운누각이다.

성벽따라걸어도봤으면하는아쉬움이남는곳이다.

고려충정왕3년(1351년)제위3년만에기(공민왕)에게양위하고

서문밖용장사에기거했다는기록이있는곳으로

용장사라는절이있었다고추측하는저수지로

왜적들이침입해서자취도없이몽땅

불태워없애버린곳이라는기록만이있는곳이다

너른저수지로되어있는용장사라추정되는이곳에서는

물때가지나면물속에서잔재유물들이보인다는것으로

근처에사는사람들에의하면잔여유물들이더러나온다기도하고해서

이저수지가용장사이라고추측들은한단다.

지금은국화저수지라하며낙시터로사용되고있었다,

이곳이국화리라서아마도그냥국화저수지라하는데

일반역사가들은이곳을용장사추정지라고한다.

잔재의유물로한때이곳에서팔만대장경을주조했다고도하고

선원사지가이곳까지였다라는기록도있다고도한다.

강화석수문

인천강화군강화읍국화리883유형문화재30호로등록되어있는강화석수문

용장사라는추정지가국화리저수지에서흘러내린물이강화읍을통과하는

동락천을따라‘강화석수문(유형문화재제30호)’으로향한단다.

강화석수문은강화산성의내성에연결되어강화읍을통하여흐르는

락천을가로지르는수문으로서조선숙종37년(1711)에축조되었다고기록되어있다

3개의홍예문으로된이수문은화강암으로축조하였으며

이수문의길이는18.2m,높이2.7m,홍예의높이는1.7m,폭은3m란다.

서문건너편에있는이강화석수문은이리저리옮겨다니다이곳으로이전된것으로

지금은강화시민의휴게장으로활용하고있었다.

안내자가돌다리도두드려보며운치있게걸어보라해서한바퀴빙돌아연무당옛터로올라가다.

연무당옛터

일본의강압에못이겨나라를잃어버리는신호탄격인

강화도조약을체결했던곳인연무당옛터이다

이곳은기념비만달랑있지강화도조약이체결된곳이라는안내문은찾아볼수도없었다

치욕의장소일지라도역사적인의미로강화도조약을기점으로해서

근대화로나가는기폭제도된것이라는데

몽고와의항쟁과청나라와의항쟁을의미하는강화산성보다

역사적의미가더클수있는이곳이라고해설자의말씀이시다

후손들에게나라잃어버린시발점이라는것은알려야하지않을까!!!

무언가아쉬움이남는것같았다.

연무대는원래는조선군의훈련장이었는데

호국의의지가있어야하는곳에서일본의무력앞에

무릎을꿇어야하는치욕을당하였던곳이다.

      이치욕의장을헛되지않기위하여그당시박정희대통령께서

      연무당옛터를수습하여이은상의글을한글의서예의대가로알려진

      김충현의글로비각을새겨넣었다.

      ***

      역사는간단없이흘러가되교훈은남는것이니

      이곳연무당은그역사의교훈을듣는데다

      일찌기여기에서강화부의군사들을훈련했었고

      최근세1876년고종13年2月26日이른바

      병자년한일수호조약을체결했던집이다

      이미그전년에일본의군함운양호가들어와

      침략적인야욕을품고초지진포대를공격하고

      영종도에내려살육과약탈을자행하고

      이듬해봄다시군함과수송선을이끌고다시

      한국과일본의수호조약을체결하자고강요하자

      우리는거기에따라부산,원산,인천을개항하여

      그로인해서구문명을받아들이기는했지마는

      실상은도둑에게문을열어주었던것과같이

      일본의정치적경제적군사적침략이시작되어

      마침내망국의쓰린역사를맛보고야말았었다.

      1976년박정희대통령께서친히돌아보시고

      이연무당터야말로민족의역사적시련장이며

      자주적역량만이사는길임을보여준곳이므로

      이곳을길이보존하도록하라는분부를내려

      문화공보부와경기도가그깊은뜻을받들어서

      폐허를쓸고이같이깨끗하게꾸며놓았거니와

      우리는여기에와서스스로깨닫는것이있다

      그것은오직제힘을키우고기른다음에라야

      어떤고난이든지능히이길수있는것이기에

      그뜻을돌에새겨자손만대에길이전한다.

      -1977년8월일이은상짓고김충현쓰다-

      ".그냥흘려보낼것이아니라가슴속에새겨야할일"이라고

      민족자주의식을드높이간직해야한다는경고비쯤으로생각하라는

      해설자의말씀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