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길 5 / 갑곶돈대.이섭정.충렬사.대명포구

초지진에서시작된강화길은저위의갑곶돈대까지갔다.

갑곶돈대

【누정】이섭정(利涉亭)갑곶나루언덕에있다.

○이첨(李詹)의기문에,“한강(漢江)과임진(臨陣)이합류하여조강(祖江)이되고,서쪽으로잇달아바다로들어가는데,따로흘러갑곶이되었다.

전조(前朝)의고왕(高王)이여기와서피난하는데,원(元)나라군사들이쫓아와말하기를,‘갑옷만쌓아놓아도건너갈수있다.’고하였기때문에갑곶이라이름하였다.

강화부는거진(巨鎭)으로해문(海門)에있어서육지와연접하지않았다.

부의북저(北渚)는물길이다통했으나다만물이너무넓어서어쩌다풍랑을만나막히면때때로건널수없다.만일배로조강을건너거나육지로가면30여리만에갑곶에이르는데,건널목이조금좁아서건너기쉽기때문에부사와감사(監司)가순찰할때나조정의명령을전달하는신하도모두이길을거쳐부로가고,그밖에왕래하는나그네들도이길에늘어서니진실로의당여기에정자를지어서보내고맞이하는장소로삼아야한다.

홍무(洪武)무인년가을9월에나와한고을에사는이성(李晟)이가선대부(嘉善大夫)로이부에부사가되어병마단련의임무를겸하였다.

부임해서는군민(軍民)의모든정무가이미모두잘진행되었다.이듬해봄에관리와백성을모아놓고이르기를,‘고을의치소(治所)에놀이구경하는장소를두는것은진실로논의할일이못된다.

그러나기운이번거롭고정신이산란하며보는것이막히고뜻이걸릴때를당하면군자는반드시놀고쉴만한물건과높고상쾌한도구가있어서,군자로하여금이리저리바라보고거닐며정신을맑히도록한뒤에야번거로운것이간단해지고산란한것이안정되며막힌것이소통되고걸린것이트이게되는법이다.

또더구나끝없는바다를바라보고하늘과물이아득한데를엿보아만물의처음과기운의시초에마음을노닐어나의호연(浩然)한기운을기르고,또그것을사람들과같이하면즐겁지않겠는가.’하니,관리와백성이모두함께‘그렇다.’고하자,곧정자를지을계획을세웠다.

마침김영렬(金英烈)이해도(海道)를절제(節制)하게되어서섬에서재목을취해서실어다공사를도와준만큼노는사람을부르니,그역사에드는물품은공금(公金)을낭비하지않고도여유가있었다.

이에옛터를이용해거듭새롭게지어난간창문으로사신(使臣)이올라와놀게하고,담을돌려쌓아서나그네가유숙할수있게만들었다.

서늘하면서도따뜻하고견고하면서도치밀하며,돌을쌓아높이고낮은담을돌려쳐서기한을정하여완성하니,관리와백성들은깜짝놀라서말하기를,‘하늘에서떨어졌나,땅에서솟았나.’하며신기하게여기지않는이가없었다.이부사가장차갈리게되자,나에게편지를보내정자이름과기문을지어달라고청하였다.

나는그물은건너기쉬운데,정자가마침나루터에있기때문에현판을이섭정(利涉亭)이라하고,

또이부사는중후하고기개가있어서그가정사할때에는사람들과더불어소요(逍遙)하는즐거움을함께하고,

그가떠남에는백성들이두고두고생각하게하였기때문에이정자에또한기꺼이기문을짓는것이다.”하였다.

연미정(燕尾亭)갑곶나루위에있는데,작은산이있고그아래에서바닷물이나누어져흐르기때문에연미(燕尾)라이름하였다.하도(下道)에서조세를나르는배가지나가다가정박하는곳이다.

○고려고종31년(1244)에시랑(侍郞)이종주(李宗冑)에게명하여구재생도(九齋生徒)를이곳에모아놓고하과(夏課여름공부)를시켜55명을뽑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강화도호부에서)

인천강화군강화읍갑곶리1020에위치하고있는갑곶돈대와이섭정

서울에서강화의위쪽으로들어오는길목이바로갑곶돈대이다.

갑곶돈대는강화해협쪽으로뻗어나간곳위에

작은규모의보루즉적이쳐들어오는것을막기위해쌓은진지로서

대포를배치하고적을지키는곳이었는데지금의갑곶돈대는예전것이아니고

1970년대에고증을통해복원해놓은곳이란다

저보루끝에는700m는날아간다는홍이포가전시되어있었다.

저끝에구강화대교가보이네!!!!

갑곶돈대에서바라본김포시

이곳에있는대포를홍이포라부른단다,

유럽사람들이사용했던화포를"붉은오랑캐의화포"즉홍이포라했다는데

조선후기에우리나라군대에서사용하던대포중의하나라고

명나라를통해들여왔다는데700M정도의거리에있는목표물을맞출수있는성능이었다니

그시절엔최신무기에해당되겠지

고려가강화도로천도하고40년가까이항쟁할수있었던것은

강화앞해협의물살이너무거세기때문이었단다

그후200여년이지나서오랑캐에게쉽게함락된것의계기로

남한산성으로피신하던인조는이곳에피신한왕자및왕족들이

인질로잡히자어쩔수없는항복을했다는데

강화가함락된원인으로전해져내려오는소문에의하면

섬에계속된간척사업으로육지와의거리가좁혀졌기때문에

오랑캐가김포일대에서뗏목을만들어쉽게건너왔기때문이라는말도전해진다.

아하~~그시절에도간척사업을이곳에서는하고있었단것이겠지!!!…

이섭정

정자이름이이섭정

고려때몽골과외교교섭장소로썼던장소라는데

몽골과의갈등을겪은어떠한기록도전시해두지않아볼수는없었다

이정자도오래전에자취도없이허물어진것을

강화복원정화사업이라는것으로다시세워진것이란다.

높은곳에위치해있어동서남북사방이확~~뚫려

저쪽건너포구쪽을바라보며시원한바람을맞으며

한참을그렇게앉아있었지요!!!

이섭정이층에서바로본건너편포구.

저물살을헤치고어찌이강화에까지왜구들이쳐들어왔는지

강화의지형이육지와도가깝고사방이열려있어

이쪽저쪽진치고식량보급로도좋았을것이고또한강화의땅은예나지금이나비옥하니

식량조달잘됐을터라왜구들이침입하기안성맞춤이였겠다.그러나

침입시민초들의삶은얼마나고달팠을까???

확뚫린이섭정정자에앉아바람에출렁이는논밭을보면서스쳐지나간생각들이었다.

벌써벼가익어누런황금색을띠고있는것을사진으로발견되다니..ㅋ

앗~~~저빨간반바지여인은누굴꼬???…ㅋ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의비석이정문왼편에자리하고있었다

이비석이왜여기있을까하고의아했더니

이곳강화가13세기금속활자인쇄술을발전시킨고장이란다.

처음안사실이였다.

이러니배운다는것이끝이없지~~~

비석을세운이유는

세계최초로금속활자를개발한고려인의우수성과과학성를널리알리기위해마련했단다

예전국사시간에우리나라가독일구텐베르크가1453년경에만든금속활자를보다

200년앞서있었다고주입식교육을받았을때달달외었던기억이난다.

"고려시대금속화폐(동전)의일종인해동통보를주조한기술로

금속활자를만들었다는설명도들었고

이자겸의난으로많은책이불타버려없어진것을여러종류의책을

짧은시간에찍기위하여금속활자를발명하였다는이야기도들었고

그당시이규보가그의"동국이상국집"에

1234년쯤고금상정예문50권의책을금속활자로28부찍었던일을

싣고있다는설명도들었다."

(해설자로부터받은프린트에서발췌!!!.)

강화비석군.

이비석군은조선시대선정을베푼유수,판관,경력,군수등의영세불망비및

선정비등많은비석들을모아놓은중가장자연보호의일환으로세운금표가눈에띈다.

1703년강화유수부(고려궁지)의경고문인금표는가축을놓아기르는자는곤장100대,

재나쓰레기를함부로버리는자는곤장80대라고적혀있다

***

와아오늘날에도이법을활용하면좋겠다

거리를걷다쓰레기보는게제일기분나쁘거든

아마도서울광장에서싸이공연하던날

거리에떨어진쓰레기를이법에적용했다면

말춤추던것들시청앞광장에엉덩이다까고

곤장으로피비린내날정도맞아야하는것들쌔고쌨었겠다.

우리의원숭이님맘도좋아

젊은이들에게말춤맘껏추라고광장도내어주고

지하철,버스도연장해주고,,원숭이께서도말춤을좋아하다니!!!,,,참말로

양심고백할인간들쌔고쌘나라

싸이는양심고백해야되겠지???김장훈에게어떤짓을했는지!!!

싸이의말춤???그거야잘한일이지!!!

누가그거모르나아..

무대에서미치지못해능력껏(?)군대이탈해서

무대에서날친범법자가어느날노래하나떴다고

군대두번간것을영웅담처럼꾸며주는우리나라..

아~~못마땅해라…

하여튼이경규의힐링캠프는못하는일이없어요!!!

한국은말춤으로유명하고

일본은노벨상으로유명하니아고~~배아파라~~~

난노벨상이더좋겠다아’

일본은노벨상이17개란다..

돈쏟아부어사온노벨평화상하나달랑은반갑지않고!!!

에이~~피비린내났던역사나되돌아보면서

나라걱정이나좀해보자구.

강화역사관

강화충렬사(江華忠烈祠)

충렬사의소재:인천강화군선원면서행리371

이곳에는선원김상용과공조판서이상길의26분의위폐를모시고제사를지내는사당이다.

김상용(仙源金尙容,1561~1637)은조선후기안동명문의가문에서태어나다

1590년출사해서광해군의폐모정책에반대하고정계를은퇴했다가

1623년인조반정에의해정의가구현되자정계에복귀한다

1638년4월후금은국호를淸으로고치고조선에대하여군신관계를요구한후

거절당하자10만대군을이끌고조선을침입해오는병자호란이일어난다

침략한지10일만에서울로육박한조선은당시원로대신인선원김상용이

종묘사직의신주를받들고빈궁강씨와원손,봉림대군,인평대군을모시고강화도로피신

1637년강화도로넘어오는청군을막아내기위해화약더미에올라가불을당겨저항했다

선원김상용이죽은지4년후1641년(인조19년)그를기리는사당을세웠다

처음에는현충사라했으나1658년효종때충렬사로이름을바꾸었단다

남아있는건물은사당(충렬사)과제수를준비하던전사청과성취당이남아있었다.

서당안에는중심에선원김성용의위패가모셔져있고그좌우에25분의위패가모셔져있다

김익겸(1614~1637년)

영의정까지지내셨고광원부원군에추봉되었고시호는충정(忠正)

김익겸이폭사당할시아내원씨의태중에는유복자가있었는데

그유복자가서포김만중(1637~1692)이시란다.

제사때제수를준비하던전사청이다

공부하던이들의기숙사성취당이다

읔~공부해서성취하라는뜻인가????

정문두고옆에쪽문으로넘나드는기분이오랫만에느끼는정감으로다가오다.

충렬사한바퀴돌아보고문을나서려는데이미해는석양으로기우러져있었다

마지막코스대명항으로출발했다…

대명항

비릿한내음의시장을건너포구쪽으로건너오니

해는이미지고살짝작은어둠이내리고있었다.

포구의멋을다담아내지못한것이아쉽다

이곳에서강화길탐방은끝이나고

저녁먹고돌아오는길에손에들려있는것은…강경표젓갈반찬류!!!….

던길되돌아보니주로왜구와의격전지가심한오른쪽을돌았구나하며

다음은왼쪽의서해바다를끼고돌아보는것도괜찮겠다는생각이든다,

강화도하면전등사마니산만가는걸로알고의미없이돌았던것에서

역사적관점에서다시본강화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