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4) 광성보 누각에 봄바람 불어오는데 Posted on 2013년 4월 7일2016년 3월 24일 by 松軒 광성진(廣城津) 春風來到廣城樓津吏迎吾指海洲 三兎三龍三蛇字知潮有信可行舟 광성보누각에봄바람불어오는데 나루지기나를맞으며바다섬을가리키네. 묘시진시사시의삼자시가있으니, 물때를잘알아야배가갈수있다네. 늦은점심을마친우리에게마지막코스로우리의길라잡이님께서광성보로가자신다. . 지난여름은강화초지대교를건너초지진과돌아올때는 강화대교쪽인갑곶돈대를보고왔지만 두돈대의중간위치에있고육지와가장가까운거리에있어 외적들과가장치열한격전지였다는광성보를가까운곳에서놓쳤던장소였다 광성보입구에서손돌목돈대를거쳐용두돈대로돌아왔는데 꽃철이었다면얼마나좋았을까!!! 그러나꽃철이아닌관계로사람들에게밟히지않는 한적한광성보를한바뀌돌수있었다는것으로위안을삼을수밖에없었다. 광성보1658년(효종9년)강화유수서원이(徐元履)가설치하여숙종5년1679년에축조된곳이고 3개의돈대(광성돈대,손돌목돈대,용두돈대)와1개의포대(광성포대)로이루어졌다, 이곳은고종8년1871년신미양요때가장치열한격전지였단다. 미국이통상을요구하며침입한미국해병대450명에의해이곳광성보를지키던 어재연(魚在淵)이하전장병은열세한무기로죽을힘을다해싸웠어도 전원순국한곳이란다. 이때성첩과문루가파괴된것을1976년복원하는동시에 당시전사한무명용사들의무덤과魚在淵의쌍충비각(雙忠碑閣)을보수,정비하였단다. 신미양요때파괴되었던포좌4개소와포3을복원설치하였다 현판안해루(按海樓)는"바다를제압한다"라는뜻이다. 천정에는용의그림이있고문밖으로는강화앞바다가보인다. 강건너가김포시인육지와가장가까운해안으로 외적의침입이가장용이한거리에있는듯하나 물살이쌔서만만치는않았던곳으로전해진다. 광성돈대는 숙종5년(1679년)에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승군(僧軍)8.000명과 어영군(御營軍)4.300명이40일만에완공하였다고전해온다. 전시된무기로는불랑기.대포소포이다. 불랑기(佛狼機):임진왜란을계기로널리사용된화승포란다. 소포(小砲):우리나라재래식화포중가장발달된형태를갖추고있는사정거리300m 대포(大砲):병자호란에사용되었다는대포는홍이포라고도하는데사정거리700m 광성돈대위에올라가바라본안해루의정경과 바다건너김포쪽을바라보다 이길을걸어가면서앞으로펼쳐질경치는상상이나했겠는가? 신미무명용사탑과쌍충비각 쌍충비각이있는이곳은신미양요의광성보전투에서 미국의로저스가이끄는미국함대와치열한격전을벌였으나 전군의장렬한죽음을맞이한곳으로. 순절한조선후기의무신어재연(魚在淵)과그의아우어재순(魚在淳)등의 전적을기리는전적비가있는곳이다. 1976년광성돈대복원작업의일환으로정비보수되었고 해마다음력4월24일이면어씨형제의충절을기리는제를올린다고한다.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 강화군향토유적제10호로지정되었다. . 쌍총비옆내리막길에있는무덤이궁금하던차지나가던낯선분이 여기에와서이묘를안보고가면안되지요하는말이들려내려가보았다, 그냥지나쳤다면후회될뻔했던곳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신미양요로인해광성보전투에서미국의해군과격전끝에전사한53인중 어재연과어재순은고향에안장하고남은51인은 신원을분별할수가없어 여기7기의분묘에나누어안장하였단다. 殉義塚은義를위하여죽은이의무덤 강화도와육지사이의가장좁고물살이거센이곳을손돌목이라불렸다 가장놓은곳에위치한손돌목돈대는원형으로이루어진곳으로 고려시대몽고의침입을받아강화도로피신가는고종의일행을태우고 바다를건너가는도중물살이점점거세진것을 왕은뱃사공손돌이적과내통하여자신을죽이려고한다는 왕의오해로억울한죽음을맞이한 뱃사공손돌의이름에서유래가되었다고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