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탑은높이가큰반면2층부터는높이가줄어들어
지금은3층까지만남아있지만원래는9층까지였다고전해진단다.
분황사석탑의돌이참신기한것은덩어리돌을벽돌찍듯이만들었다는것이아닌가
돌을흙으로구워벽돌처럼다듬었다고하는데
어찌돌을벽돌처럼만들었을까
흙을틀에넣어눌러찍어내는것도아니고
신라인들의기술이라는최고의장인정신을여기서도보인다.
돌하나하나햇빛이반사해서사면이다른색을만들어내는걸
보는것만으로감격해서인지자꾸빙빙돌게되면서
천오백여년전의돌쪼는정소리도들리는듯
속을들여다보고싶은마음이었지만
올라가지말라는말잘듣는관광객이라서
누군가가속을봤느냐물어보는데어찌되어있을지
속에얼굴만있는부처님계시다는데..이것이
아직도궁금한것이분황사를보고난아쉬움중하나이다.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가장고고(高古)한예(例)로
경주(慶州)의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을들어야할것이다.
분황사탑(芬皇寺塔)은사기(史記)의기록(記錄)으로보아
분황사(芬皇寺)창건당시(刱建當時)의것으로보여지며
사면(四面)에감입(嵌入)된인왕상(仁王像)조각수법(彫刻手法)으로도수긍(首肯)되는바있다.
이탑(塔)은현재(現在)삼층(三層)가지만남아있어원래(原來)의층수(層數)가
문제(問題)되고있는데동경잡기(東京雜記)에의(依)하면
임진란(壬辰亂)때왜병(倭兵)에의(依)하여반(半)이헐렸고
그후(後)우승(愚僧)이개축(改築)하려다가남은반(半)마저허러젔다고하였으나
이기록(記錄)은매우의심(疑心)스럽다
1915年일인(日人)들이해체수리(解體修理)를한바있었는데
當時第二層과三層사이에서석함(石函)속에장치(裝置)된
사리구(舍利具)가발견(發見)되엇던바
그중(中)에는창건당시(刱建當時)의것으로보여지는장암구(莊巖具)와함께
「숭령중보(崇嶺重寶)」,「상평오수(常平五銖)」등(等)고려시대(高麗時代)에
사용(使用)되던고전(古錢)이발견(發見)된것을보면
고려시대(高麗時代)에개탑(開塔)하였던사실(事實)을알겠고
그후(後)1915年까지제삼층(第三層)까지건재(健在)하였던것이니
동경잡기(東京雜記)의기록(記錄)은그대로믿을수없는것이다.
또한문제(問題)되는점(點)은
1915年의수리(修理當時)의변형(變形)은없었을까하는점(點)인데
탑신(塔身)밑에화강석(花崗石)받침이있어
초층(初層)탑신(塔身)의평면(平面)은움직일수없었을것이고
수리전(修理前)의구경(舊景)과사진(寫眞)을통(通)하여비교(比較)하여도
대차(大差)없고보면문제(問題)가되지않을것이다.
이탑(塔)은야석(野石)으로축조(築造)한높이약(約)1m의기단(基壇)을마련하여
일변(一邊)장(長)약(約)13m의방형(方形)기단(基壇)중심(中心)에
초층(初層)탑신(塔身)이놓였는데
그밑에는일단(一段)의화강석(花崗石)받침돌이받치고있다.
그위에일변장(一邊長)약(約)6.6m높이약(約)4m의초층탑신(初層塔身)을축조(築造)하였다.
탑신(塔身)을구성(構成)한석재(石材)는
흑갈색(黑褐色)의안산암(安山岩)석재(石材)를전(塼)과같이자른것으로
길이30cm내지(乃至)9cm로전재(塼材)와같이고르지않다.(펌)
분황사가있는이동네이름이구황동인데
"황"이들어가있는절이아홉개나되는것이
분황사황룡사,등이있다고도하도
구…9..황룡사9층탑이듯이
여기모전석탑도그럼9층이맞네…
이름이유래하듯이구,,황,,,동,,ㅋ
모전석탑의뒤로돌아가면작은전각이있는데
이곳이바로보광전!!!
여기도보물이있었네.
http://hanulh.cafe24.com/1845
보광전의역사
이속에안치되어있는약사여래입상이국보급이라는걸모르고
전각입구에사진찍지말라는글귀만이있어
왜지???하고들여다보려니접근금지란다.
그래도열려있는문으로들여다보니
벽하나정도에불상의크기가천장끝까지
불상을어떻게세웠을까불상이꽉들어앉힐정도의크기밖에안되는데
어떻게전각을지었을까하는의문이생긴것은
혹~~~불상을놓고전각을지은것은아니겠지???..
石井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부른다
석정은바위틈사이로솟거나흐르는물을고이게바위를움푹하게파고
그위에다시시설을해만든우물이란다.
남아있는신라우물가운데가장크고우수한것이
바로이석정이란다.
천몇백년전에만들어졌던우물을지금도그대로사용하고있다고하는데
진짜아!!!
신라시대의유물로벽체를둥글게쌓아올리고외부는팔각으로다듬었다
이런형태는불교의팔정도와원융의의미를지닌단다.
원융/모든법의사리가구별없이널리융통하여하나됨을의미한다.
팔정도/불교를수행하는데있어서의여덟가지중요한덕목
(정견,정어,정업,정명,정념,정정,정사유,정정진)이다
전설에따르면
이우물에는세마리의호국용이살고있었는데,
원성왕11년(795)에당나라의사신이이우물속에사는용을
세마리의물고기로변하게한뒤가져가는것을
원성왕이사람을시켜뒤쫓아가서빼앗아왔다고한다.
그뒤삼룡변어정이라고부르게되었다.(펌)
원효께서이곳에서화엄경소[華巖經疏]를썼다고도전해진다.
화엄경소란
신라시대의승려원효가"화엄경"을주석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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