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史跡地 인 인사동의 승동교회에서…

승동교회[勝洞敎會]

인사동을나갈적마다늘지나다니는승동교회

옛모습그대로있을까궁금함을간직했었어도

막상긴좁은골목을걸어들어가기선뜻마음이가질않았던곳이다

종로축제기간인인사동에는

플래카드가여기저기걸려있고

전시회,관광객등등…사람들에떠밀려갈정도로많다보니

이미어느곳을볼까했던마음싹사라진체

붓과인상만사가자고집으로돌아오려종로2가쪽으로

걸어나오긴하는데….뭔가허전한마음으로

이참에들어가보자마음먹고들어간승동교회

인사동에이처럼조용하고한적한곳도있었나의아할정도였다.

조용한인사동을원한다면이곳승동교회에서….ㅋ

내가본그옛날기억의승동교회의모습???

일요일이면교회의종소리가늘시끄럽게만여겨졌던교회이기에

집근처에있어도발걸음잘안하던교회라서

놀던추억없는곳이지만

하얀페이트가칠해졌던교회로기억된곳이

빨간벽돌로바뀌어좀은낯설어보였다.

그래도…다른커다란교회보다는외형에많은변화가없는교회라니

그나마다행인승동교회가

3.1독립운동거사를위해학생대표들이모의하였던곳!!

여기가???..

승동교회면려청년회장이었던김원벽(金元璧)을비롯해서

학생지도자들은1919년2월20일승동교회1층밀실에서학생

독립만세운동을숙의하였다.

그러나독립만세운동이범국민적으로이루어지게됨에따라서

이곳에서23일학생측이작성한독립선언서를소각하고

28일독립선언서를배포하였다.

한편당시차상진(車相晋)담임목사는

"十二人等의長書"를조선총독에게제출하고투옥당하였다.

그후로승동교회는

일본경찰로부터심한수색을당하는등많은수난을당해야했다.

(안내문)

1893년설립되었다면

다음해엔청일전쟁이일어난해이기도하고

민비시해사건인을미사변이일어난해가1895년이었으니

이런사건들을나열하고보니오래된교회이지만

이미9년전

우리나라최초의교회는1884년황해도장연군대구면송천리에세워진

외국인선교사에의해세워진교회가아닌조선인서상륜에의해지어진

우리나라최초의자생적인소래교회가있었다.

승동교회의연도를보면서그럼우리나라최초의교회가궁금해서찾아보다.

제15대박상훈목사님께선1991년부터오늘날까지

오랫동안담임목사로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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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미국북장로회선교사무어(Moore,S.F.)

곤당골(지금의소공동롯데호텔자리)에있는가정집에서

신도16명과함께첫예배를드린것이오늘날의승동교회의모태가되었고

1912년지금의인사동으로교회가옮겨져오다.

승동교회가당시엔다르게부른명칭은백정교회라고불렸다는것도

이번처음알았다…

선교사들은조선의신분제도에서최하층민이백정들을대상으로

포교활동을하였고또한

그이유로양반들에게는외면을당하기도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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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교회로알려진연유는???

당시박씨(朴氏)성을가진백정이

아들을이곳학당으로보내학문을배우고개신교신자가되게하였는데

그의아버지가열병으로사경을헤매자

무어목사가친분이있던임금의주치의를대동하여그를치료하여완쾌시켰다.

박가백정은감복하여개신교도가되었고

무어목사에게서성춘(成春)이라는이름을받았다.

박성춘으로인해많은백정들이교회를다니게되었다.

하지만그때문에많은양반들이

백정들과는같이예배를볼수없다며교회를떠나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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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외국인의주도권에서벗어나서

우리나라사람에의한최초의신학교가이교회에서출발하였다.

이학교가오늘날한국신학대학의전신인"조선신학교"이다.

1959년9월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통합측과합동측으로나뉘면서

합동측의총회가이곳에서진행되어

합동측교단의모체가되었단다.

승동교회는2001년4월6일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제130호로지정되었다.

조선정치사의중요인물로평가되는몽양여운형이젊은시절목사가되기위해

승동교회에서선교사로활동하였단다.

여운형씨가목사되시려구???.

1919년3·1운동때에는이교회의학생들을중심으로

한대대적인학생시위가일어났으며,

1939년에는이교회에서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를설립하였다.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