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에서세병관은고개하나깔딱넘어서면바로있었다.
충렬사에서세병관으로넘어오면서
역사적인의미가깊은곳에주변이어수선한도시형성이
씁쓰름하게남아있다.
그나마118년만의"통영삼도수군통제영"복원이라는말에
다행이다라는생각이들면서
그래도가장가고싶었던곳이세병관이었다.
통영문화동벅수
세병관입구에들어서려니이상한돌이서있다
문화동벅수가뭔뜻???하고그냥툭찍어대고왔는데의미를찾아보니
이런커다란뜻이있더란말이지…ㅋ
경남통영지역에서는장승을벅수라부른단다.
민간신앙의대상물로서대채로남녀한쌍으로이루어졌지만
이돌벅수는홀로세워졌다.
마을의방역마을의방역(防疫),방액(防厄)을위한비보(裨補)장승으로
동남방이허하다는풍수지리설에따라만들어졌다고한다.
동남쪽이좋지않은방향이란뜻일까???…ㅋ
통제사께서만말타고올라가셨군!!!…ㅋ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60531&cid=49335&categoryId=49335
세병관의객사의구성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01566&cid=49359&categoryId=49359
통영세병관의설명
망일루(望日樓)
望日樓는광해군3년(1611년)제10대우치적통제사가세웠으며
일명세병문이라고도한다.
통행금지와해제를알리는커다란종이있어종루라고도했던망일루는
영조45년(1769년)제128대이국현통제사가
화재로소실된것을다시지었고그후2000년에중건하였다.
수항루[受降樓]
수항루는2층누각으로통영성남문에위치하였다.
임진왜란의승전을길이기념하기위하여숙종3년(1677년)
제58대윤천뢰통제사가건립하였다.
수항루는봄가을군점(軍點)과수조(水操)때에
모의왜병으로부터항복받는행사를거행해왔단다.
해안매립으로인해선착장원래의모습을잃어버려
1986년현재의위치로이전하여1987년에복원된수항루(受降樓)
군점(軍點)과수조(水操)란
이순신의한산도대첩을기념하기위한축제로
강구안(문화마당)에서매년기념행사중하나.
군점(軍點)
수조(水操)
중군이머물던산성청[山城廳]
군관이근무하던좌청[左廳]
지과문[止戈門]
세병관의망일루에이어두번째문인지과문(止戈門)은
"창을그친다."라는의미인데
창(무력)을그만사용하고싶다는것은곧평화를바란다는의미이다.
통제영영역에서중심에자리하고있는세병관을본영군이라하는군…
지과문을넘어스려니문기둥을받치고있는돌의모습이예사롭지않다.
統營洗兵館
세병관(洗兵館)
洗:세-씻다兵:병-무기館:관-관청
세병관은‘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따온말로
‘은하수를끌어와피묻은병기를닦아낸다’는뜻이다.
‘兵’은군사가아닌병기로보아,더이상전쟁은말고평화를누리자는것이다.
[세병관에대한설명은검색에서가져옴]
국보제305호인‘세병관’의명칭은중국唐의두보詩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따온말로
‘하늘의은하수를끌어와피묻은병기를닦아낸다’는뜻이다.
혹자는‘세병관(洗兵館)’의‘兵’을‘군사’로보아군인을뜻하는것은잘못해석이며,
이때‘兵’은군사가아닌무기로봐야할것이다.
세병관은제6대통제사이경준이두릉포(한산도)에있는통제영을
이곳으로옮긴이듬해인선조37년(1604)에완공한통제영의중심건물이다.
이건물은창건후약290년동안3도(경상ㆍ전라ㆍ충청)수군을총지휘했던곳으로
그후몇차례의보수를거치긴했지만당시의위용을자랑하고있는
지방관아로서최고의위치를차지하고있다.
1592년4월13일임진왜란이발발하자1594년대외방어세력을일원화하기위해
충청,전라,경상도의삼도를합해총지휘하는‘삼도수군통제영’이다.
이건물은본래1603년(선조36)에이순신의전공을기리기위해세웠으며
후일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건물로사용됐다.
초대‘통제사’는이순신제독이다.
펌
마루보다단을높게해서궐패를모시는궐패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