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두번은 가는 회암사지…

그어떤날이든아버지성묘길은흐리고궂은날이없다.

살아생전아버지께서내게주신사랑은늘맑음이셨듯이!!!

일년에두번찾는친정아버지성묘길은늘늦어야만한다.

시집행사끝나야아버지계신곳찾아가는출가외인이기에…

입구에들어서면쭉쭉뻗은가로수와

시원하게확~트인너른회암사지가

눈에들어오기시작하면서부터반갑다.

회암사지

회암사가건립된연도는정확한기록이없지만여러기록에등장한연유로인해

12세기무렵에는이미창건되어상당한규모를갖추고있었을것으로본단다.

고려말~조선초에왕실의적극적인후원으로많은불사가이루어졌고

당시불교계를주도하던고승들과더불어승려3,000명이머무는대사찰이었다니

그규모가얼마나클것이라는것은미루어짐작할수있다.

웅장한규모와위세를자랑하던회암사는명종실록에의하면

1566~1595년쯤유생들에의한방화로폐사된것으로추정된다고한다.

우뚝솟아있는당간지주의모습도반갑다.

이절의규모가컸다라는것을가늠해볼수있는당간지주

양주회암사지발굴단에의해1997년부터연차적인발굴조사를통해

그규모가드러나기시작된이곳회암사지.

가람배치가평지가아닌산간에위치하면서도

8단단축을이루면서남쪽에회랑(回廊)을두고있는점은

궁궐이나가람배치의특징과같다고하니

복원하는데성공한다면

궁궐의면면을볼수있는절터에서의유일한곳이될듯하다.

일년에두번은이곳에올적마다

발굴을하는거야?안하는거야?하고의심이갈정도로

늘한적했던곳이다.

그러나

이번성묘길에선뭔가가되어가고있는

활발한발굴현장이란느낌이들었다.

아마이런움직임이있는느낌처음인듯…ㅋ

산기슭에지어졌던절로8단단축으로이루어졌었다고하니

다음에는입구에서내려첫째단..둘째단…셋째단하면서

걸어보며세어봐야지…ㅋ

예전에봤을땐서너명이앉아숟가락들고땅파는듯해서

저렇게해서언제복원될까했더니

이번에거중기까지등장하고

곳곳에쌓아놓은곳의파란덮개들이

마치오픈날짜다가오는듯한움직임으로보여

다음에올땐복원되어가는과정을

더많이볼수있게될것같은느낌이든다.

돌을들어단을쌓는과정이도르래를이용하여

사람의힘에만의지해야하는과정이

꼬옥~~~

정약용의발명품거중기로

수원성을짓고있는모형에서본듯…ㅋㅋㅋ

대충모양세를잡아가는듯….ㅋ

저많은주춧돌위의절의모습을

어디까지복원할것인가궁금해진다.

일반사찰과다른특이한모습으로

태조이성계가자주드나들면서궁궐의배치를닮아

이성계의또다른왕궁으로이성계의정신적인은신처로알려진회암사지.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38879&logId=5012478

(가을이머무는풍경)

이성계의정신적은신처…회암사

회암사가조선유생들에의해완전히불탄이야기가소상히적혀있음…

조선최대의사찰로

긴세월동안훼손된채방치되어남아있던주춧돌이제자리찾아갈때

옛규모의모습이우리앞에태어날날이언제일런지.

땅속에몇백년을묻혀있거나

들판에마구버려진체흩어진돌들이

제위치를찾아가는날이

문정왕후사후에조선의유생들과인근주민에의해

파괴되고해체되어나갔던유물,문화재가

퍼즐맞추듯맞춰지는모습으로볼수있는날이겠다는생각이들다.

익숙한곳이라도

올적마다새삼스러워보인다는게또한신기하다.

좋은곳을새모습새마음으로반복해서볼수있는곳이라!!!

참..그거보면

우리아버지살아계신동안늘좋은거먹이려,입히시려

많이가르치려애쓰시더니

돌아가신후에도

딸에겐끝까지좋은곳으로까지인도하신다.

아버지계신곳이가까울수록생전에

자주말씀하시던모습..이새록새록…떠오르는바로

이것이성묘의의미도되겠지

이쯤…오면꼭걷고싶은산길..절골이다.

잠자리한마리

가까이가도움직이지않는다.

올겨울에왔을때공사하더만…건물이완성되었네….

수행의공간이었구나…ㅋ

하지만이곳에올적마다스님은눈에띄지않던데

계신가???.ㅋ

아~~~일반인에게의수행공간이란말인지…

본당있는마당은겨울의것으로…

회암사경내[檜巖寺境內]

이번은예전에지나쳤던

이곳의부도와석등중심으로

옛선사님(무학대사,나옹선사,지공선사)에대한것을알아보기로한다.

3곳으로나누어져있는부도와석등은구별이안되었던것

이번은확실히해야징….ㅋ

맨위가나옹선사인지지공선사인지무학대사인지구별이안되었었는데….

근데

,

,

,

굳이.

.

.

이걸왜구별하려는건지…ㅋㅋㅋ

계단을오르면보이는부도와석등이

이곳선사님중가장오래되신분지공선사님의부도와석등이먼저보인다

그다음이위에모신나옹선사…가장밑에있는무학대사…순으로..

***

지공선사부도및석등

指空禪師浮屠및石燈

지공선사指空禪師

지공화상은인도마가다(Magadha)국만왕(滿王)의셋째왕자로태어나

여덟살에나란타사율현(律賢)을스승으로계를받는다.

당시세계적으로유서깊은사원이자대학이었던나란타사는

이슬람교도의침입으로폐교가되고,지공화상은이대학의마지막졸업생이된다.

그헛헛함을달래려했던것일까.지공화상은19세이후인도전역의순례를마치고

중국원나라에들어와교화를편다.

특히원나라천자를만나불법을강론하매천자의총애가지극하였다.

지공화상은바로이무렵인1326년(충숙왕13)3월고려땅에들어와

1328년9월까지2년반동안금강산법기도량(法起道場),

개경감로사(甘露寺)와숭수사(崇壽寺),인천의건동선사(乾洞禪寺),양산통도사등

전국사찰을방문해법회를연다.

지공화상은특히선(禪)사상과무생계법(無生戒法)의계율관을폈던것으로전해진다.

고려불교는나말을기점으로폭넓은계층에서선불교가중흥되었던터에,

한이국(異國)스님에의해수행자로서투철한지계정신을재충전받으며

크게고무됐던것으로보인다.

입국이후3년도채안되는이기간동안

고려불교에새바람을불러일으키는지공화상을,

위로는왕에서아래로는일반백성에이르기까지크게환대했다는기록이

그같은사실을엿보게한다.

전국순회법회를마치던그해(1328),회암사의지형이마치

자신이태어나고자란인도땅의나란타사와흡사하다는데서

절짓기를시작한것으로기록은전한다.

절터를보고한눈에인도의나란타사를떠올렸다면

중창의지의발로는자연스런것이었으리라.

지공화상이이곳회암사에서얼마나머물렀는지는알수없다.

지공은다시원나라로들어가고려인이지어준법원사(法源寺)에서불법을편다.

1348년부터11년간원나라에서공부한나옹은3년동안지공화상문하에서법을배우고

3번이나찾아가법을물어마침내심인(心印)을전수받는다.

또한이무렵고려국유학생이었으며뒤에무심선(無心禪)으로유명했던

백운경한(白雲景閑,1298~1374),나옹의제자가된무학자초(無學自超,1327~1403)등이

지공화상문하에서불법을배웠으니,

고려말조선초불교를주도했던인물들에게다시금영향을미치는것이었다.

인도에서중국을거쳐고려로들어와국경을넘나들며법을폈던이국의한유능한선사는

1363년(공민왕12)연경천수사(天壽寺)에서입적에든다.

그로부터10년뒤인1372년제자달예(達睿)가영골을모셔왔고,

공민왕은명을내려이곳회암사에부도와부도비를세우고

사리를안치하니나옹이그일을담당했다.지

공화상에관한이같은내력은목은이색(李穡)이지은

지공화상비문‘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병서’(西天提納薄陀尊者浮屠銘幷序)에서밝혀졌다.

[답사여행의길잡이에서퍼옴]

지공선사비에서윗단에있는

나옹선사의부석과석등이있는곳으로올라간다.

맨위에나옹선사모셨다…

***

懶翁禪師浮屠─石燈

나옹선사懶翁禪師

지공화상의뒤를이어회암사를전국의중심사찰로만든이는

고려말불교의찬란한거목으로첫손에꼽히는혜근나옹선사이다.

20세때친구의죽음을맞이하고불문(佛門)에든나옹은

회암사로들어와수행정진하다깨달음을이뤘으니불과24세때였다.

나옹은이때지공선사에대한정보를훤히입수해두었을터였고,

어지간히존경심을키워둔뒤였을것이다.

나옹은1348년(충목왕4)원나라유학길에오르자마자곧장법원사로향해

지공선사를찾는다.

원나라에머문11년동안처음3년간을지공의회상에서정진하고,

항저우(杭州)휴휴암(休休庵)·정자선사(淨慈禪寺)에서수행하다

임제종의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서법을받는다.

그뒤지공선사를세번째찾아뵙고는또다시법맥(法脈)을이어받으니,

나옹은드물게두스승에게서심인을전수받은경우가된다.

원나라황제의청으로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개당법회를열기도했던나옹은

광활한중국땅을돌아보고귀국,이번에는공민왕과태후의청이곡진하여

오대산상두암(象頭庵)에서내려와대궐로발길을옮겨선법의요체인심요(心要)를설한다.

이때부터고려땅에서주목받는인물이되고,

이곳회암사에서수행자와일반대중에게불법을펴

고려말불교를새롭게부흥시키는원동력이된다.

그러나나옹선사는4년에걸친중창불사를마치고회향법회를하는날

회암사를떠나밀양영원사로가다가여주신륵사로말머리를돌려거기서입적한다.

1376년(우왕2)5월15일,세수57세였다.

부도는8각을기본으로하는팔각원당형으로전형적인

통일신라팔각원당형부도양식을따르고는있지만

다소경직되고평면적인면을보여주고있어

고려말기부도양식을파악하는데중요한자료이다

고려말의나옹선사

나옹선사는고려말의명승으로

본명은혜근(慧勤:1320∼1376),호는나옹(懶翁)또는강월헌(江月軒)이다.

속명은원혜(元惠)이다.

1344년(고려충혜왕5)에회암사에서수도하고,

1347년(충목왕3)에중국베이징으로가서

인도의고승지공선사(指空禪師)로부터불법을배우고돌아왔다.

1358년(공민왕7)오대산상두암(象頭庵)에머물다가

1361년공민왕에게설법하고신광사(新光寺)주지가되었다.

1365년(공민왕14)회암사의주지가된이후10여년동안머물면서사세(寺勢)를크게확장시켰다.

1376년(우왕2),1년전에들어간신륵사(神勒寺)에서입적하다.(검색)

빽빽한소나무사이엔푸른하늘이빼꼼이보일뿐

계단에앉아솔향기코끝에걸어봤다.

한참을흠~~~흠~~~ㅋ

맨밑에있는마지막부도와석등은무학대사…

무학대사는이성계의조선건국을막후에서도운명승으로생각하면되남???

***

무학대사부도및석등

無學大師浮屠및石燈

무학대사無學大師

나옹선사의법맥을이어받은자초(自超)무학대사

1327년(충숙왕14)에태어났다.

지공화상이인도에서들어와회암사를지은바로다음해다.

18세에혜감(慧鑑)국사의제자소지(小止)선사의제자로출가한뒤

용문산혜명(慧明)국사밑에서공부하고평북연변묘향산에들어가수도한무학대사는

훗날지공화상의법손자가되어이곳회암사를일으킨다.

무학이원나라에들어가지공화상을만난것은1353년(공민왕2).이듬해,

역시원나라에들어와지공화상의법을받고있던나옹화상을법천사(法泉寺)에서만났을때,

나옹은대번에무학의큰그릇을알아봤다고한다.

그로부터2년뒤나옹은무학에게“서로안다는사람이천하에가득하다해도

마음을아는사람이몇이나될까.너와나는이제한집안이다”하였다.

이들은그렇게법제자와스승으로맺어졌으나,법맥전수(法脈傳授)의식은

2년뒤고려에귀국한다음천성산원효암에서불자(拂子)를내려치러졌다.

1371년나옹이왕사가되어송광사에머물때는의발(衣鉢)을내림으로써

거듭당신의살림살이모두를무학에게전한다.

무학대사는벌써스승의운명을점쳤던지모르겠다.

1376년회암사를중창한스승나옹은

무학을불러수좌(首座)를삼고자했으나

굳이사양하고길을떠났으니말이다.

바로그해나옹은왕명으로회암사를떠나다가열반했고,

무학은전국의명산으로숨어들어행각하면서자취를보이지않았다.

공양왕이왕사로삼고자했으나끝내응하지않고은둔했다.

조선을건국한태조이성계를만난것은바로이무렵.

어느날한젊은이가설봉산토굴에머물던무학대사를찾아와꿈해몽을부탁했다.

“꿈에무너진집에들어가서까래3개를지고나왔습니다.

또꽃이떨어지고거울이깨지는꿈을꾸었는데무슨징조인가요?”하는,너무나잘알려진내용이다.

무학대사는장차백성을다스릴임금이되는꿈이니발설을삼가라고일러주었고,

이로부터이성계와무학대사는조선건국의주역과조언자로깊은관계가형성돼간다.

이성계는새도읍의터잡기작업을하면서무학대사와늘동행해

다스림에대한담소를거듭하며의지처로삼았다.

건국과함께무학대사를왕사로책봉해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전불심인

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

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묘엄존자

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

라는긴호를내렸다.

이에무학대사는화답이라도하듯태조에게법을내린다.

“유교는인(仁)을말하고불교는자비를가르치지만그작용은하나이며,

백성을자식처럼보살필때백성의어버이가되고

나라는절로부강하게된다”는내용이었다.

법문과함께옥에갇힌사람도방면해줄것을청원했다.

태조는대사의말대로정치할것을약속하고죄수를풀어주었으며,

이곳회암사에대사를머물게한다.

태조가한나라의임금으로외로움을달래기위해무학대사를초청,

슬쩍농을걸기를“대사는꼭돼지와같구려”하였는데,

무학대사는의외로

“돼지눈에는돼지만보이고부처눈에는부처만보이지요”하였다는

이야기는유명하다.

훗날태조가아들태종에게왕위를물려주고권력의무상함을곱씹으며

쓸쓸함을달래고위로받던곳도무학대사가있던회암사였다.

이곳에서운명을같이했던그들의자취도향훈도가신지오래다.

1398년,무학대사도왕사자리를내놓고용문산과금강산으로

옛발자취를따라머물다가

1405년(태종5)금강산금장암(金藏庵)에서열반에든다.

세수78세.함허기화와사명대사등의제자를두었다

[답사여행의길잡이에서펌]

***

무학대사홍융탑

[無學大師洪融塔]

1963년9월2일보물제388호로지정되었다.높이는2.7m,재료는화강석이다.

1407년(태종8)에제작된것으로높고큰8각기단위에세워졌다.

각우주(隅柱)마다방형석주를세우고그정상에보주형(寶珠形)을원각(圓刻)하였다.

석주사이에는장대석(長臺石)을둘렀고,기단부는상·중·하대석을만들었으며

상·하대석에는16엽(葉)의앙련(仰蓮:꽃부리가위로향한연꽃)과

복련(覆蓮:꽃부리가아래로향한연꽃)이,

8각중대석은각면에방형안상(方形眼象)이있으며그안에각기다른꽃무늬를양각하였다.

옥개석낙수면에는각합각(合角)에용두(龍頭)를장식하였고상륜부에는보주를세웠다.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