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시회암동에위치한임봉순의묘비에는1897년(고종34)7월29일로표기되어있다.
임봉순은1914년서울봉명학교(鳳明學校)를마치고,1919년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를졸업하였다.
3·1운동이일어나자박문호(朴文浩),김상옥(金相玉),유기원(柳基元)등과함께
『혁신공보(革新公報)』를발행하여독립사상을고취하였다.
이후상하이[上海]로망명하였다가1920년일본동경으로넘어가1921년와세다대학전문부정치경제과에입학하였으나
이듬해인1922년에퇴학당하였다.
임봉순은1922년귀국하여서울청년회에가입하였으며,1923년3월청년당사(靑年黨社)집행위원이되어
각지역의청년회에서강연하였다.
동년7월에는고려공산청년동맹서울파중앙위원회결성에참여하고위원이되었으며,
8월북성회회원으로서신흥청년동맹발기준비위원을맡았다.
동년10월에는국제청년데이를기념하여불온문서를배포한혐의로검거되기도하였다.
1924년3월조선청년총동맹창립준비위원회선전부원으로활동하였고,
같은해4월청년총동맹지방순회반경상북도지역책임을맡았다.
동년10월고려공산동맹에가입하였고,12월에는사회주의자동맹을결성하여집행위원으로선출되었다.
1925년1월전조선노동자교육대회준비위원을맡았고,같은해10월전진회를발기하고창립준비위원으로활동하였다.
1926년2월사회운동전반에관한이론및정책을수립하고노동자,농민,청년,여성등각부문별로
민족해방운동의상호연계및조직의확충을목적으로하는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조직하였다.
이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는모두874개단체가가입하였고,총회원은32만여명이었다.
이후1927년5월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창립대회에참여하였다.
이때임봉순은『동아일보』기자로재직하면서
1928년8월전라남도무안군하의도(荷衣島)[현전라남도신안군하의면]방면의답사기를연재하였고,
1931년2월에는정평농민조합탄압사건을보도하였다.
해방후인1945년9월한국민주당발기인이되었으며,
부인황신덕과추계학원(秋溪學園)을설립하여
현중앙여자중학교·중앙여자고등학교[현서울특별시서대문구북아현동소재]를경영하였다.
1954년에는조선운수주식회사사장을역임하였다.1966년8월1일세상을떠났다.
임봉순[任鳳淳](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