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 왕릉 /東九陵 (1.태조,5.문종,14.선조18.,현종,21.영조,24.헌종,추존왕.문조)

두번째조선왕릉탐방으로구리시에있는동구릉에다녀오다.

설명은주로문화재청에서제공한것이다.

http://donggu.cha.go.kr/depart/n_donggu/promenade/royal.jsp?mc=donggu_01_01

동구릉의이야기​[문화재청]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3429&cid=42840&categoryId=42843

​건원릉과능에서만난이들의이야기가다이곳에들어있음.

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되어있는자랑스런비석앞에

줄지어서있는꿈나무인유치원생의사랑스런모습에

입구부터느낌은가을하늘맑고싱그러운양청청하다.

얘들아…이런묘역을어느나라에가서보겠니?

우리나라니까…요런거만들어

세계문화유산에등재할수있는거징!!!…ㅋ

초등….중등일때소풍으로많이선호하던곳이지만

한번도가보지못한곳을이제야첫걸음을내디딜수있게되어

자못흥분된날이었다.

살아있는박물관으로건축조경정치미학의결정체가부른다하여

왕릉을우리가찾아가는할이유라는말을기억하게한다

왕릉탐방이생각보다쉽지않은것을

같은생각일꺼라믿어함께하는서예팀과

두번째탐방이이루어진날은

가을하늘맑은날이허락된날이었다.

왕릉을보기전에우선박물관에서사전교육이필요한것이기에

제일먼저찾아가는곳이다

서울동북쪽의동구릉()과홍유릉,서쪽고개너머서오릉(西)등

수도권일원에는조선왕조오백년이잠들어있다.

그중에도조선왕조7명의왕과10명의왕비·후비가잠들어있는곳이동구릉이다.

1408년조선역사의문을연태조가건원릉에터잡아누우면서

조선왕조의왕릉으로조성되기시작했다.

여기를동구릉이라부른것은1849년헌종의경릉이아홉번째로들어서면서부터이고,

그전에는능이늘어나는대로동오릉()·동칠릉()등으로불렸다.

동구릉은전체능역이59만여평에달해그광활한대지와숲만도장관이다.

숲이울창해삼림욕을즐기기에그만이고,학생들소풍장소로,

역사공부의현장으로도제격이다.

9릉은조선제1대태조이성계의건원릉()①

제5대문종과현덕왕후가묻힌현릉()②

제14대선조와의인왕후·계비인목왕후가묻힌목릉()③

제16대인조의계비장렬왕후의휘릉()④

제18대현종과명성왕후의숭릉()⑤

제20대경종비단의왕후가묻힌혜릉()⑥

제21대영조와계비정순왕후의원릉()⑦

제24대헌종과효현왕후·계비효정왕후의경릉()⑧

추존된문조와신정왕후의수릉()⑨이다.

[지식백과]동구릉

동구릉의터는태조가죽은뒤태종의명을받아한양가까운곳에길지를물색하던

검교참찬의정부사()김인귀()가추천해하륜()이나가보고

능지로택정했다고전하는한편,태조가생전에무학대사에게부탁해

자신과후손이함께묻힐적당한택지를정해두었다고도전해온다.

한양으로천도해온조선태조는생전에,

고려왕릉이대개개성부근의산악지대여러곳에흩어져있어

왕릉의참배도불편하거니와왕릉수호에드는비용도만만치않다는사실을알고있었다.

이에태조는자신과후손들의유택()을한양가까운곳에정하고자고심했는데,

어느날망우리고개에올라동구릉을바라보니왕릉의군락지로더없는길지()더란다.

짐작컨대이때이성계옆에는분명무학대사가있었을법하다.

북한정맥의정혈()에해당한다는건원릉은좌우에용과호랑이가호위하고있으며,

용은멀리태백산에닿아있고조산()은백운산,주산()은검암산이다.

그형세가완벽하진않지만지세()는가히다른왕릉을압도할만큼장하여

후대에융성한기운을일으킬만하다고한다.

이로써이성계는죽어서도오백년왕조의후손들을줄줄이거느리게되었고,

유택에대한근심을잊게된곳이라하여망우리란명칭이생겨났다는설이있다.

태종때건원릉을둘러본명나라사신들은산세의뛰어남에

“어찌이런하늘이만든땅덩이()가있단말인가.

이는필시인간이만든산()임에분명하다”고감탄했다한다.

[지식백과]동구릉

동구릉에대한설명

입구홍살문으로지나서

동구릉의나무들까지머리숙여고요한마음으로찾아보라암시하는듯…ㅋ

제실

금천교

왕궁이나절이나입구에다다르면제일먼저어디든내를하나건너야된다.

이세상과저세상의번뇌를

깨끗한물에라도씻고들어오라는의미가담겨있다고해야될것이다.

이곳도우선제실을지나치는제일먼저작은내가흐르고있었다.

다돌아보지못한아쉬움을남긴곳이다.

수릉,건원릉,인목왕후릉,헌릉을돌아보고나머지왕릉(경릉,혜릉,순릉)들은

먼발치에서바라보고만왔다.

추존왕문조(文祖)의

수릉

추존왕문조(文祖)

능호:수릉

조성시기:1890년(고종27)8월30일

능의구성

수릉(綏陵)은하나의봉분에혼유석역시하나만마련되어있어마치한사람만을위한단릉처럼보이지만,

문조와신정익황후조씨의합장릉이다.

수릉이전의왕릉은일반적으로봉분앞이초,중,하계3단의높이로나뉘어,

중계에는문석인이,보다낮은하계에는무석인이배치되었다.

그러나수릉에서는중계와하계가합쳐져문석인과무석인이같은공간에배치된다.

이는신분제도의변화에의한것이며,이러한상설제도는『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따라

영조때부터따르게되었다.

문석인은금관조복에얼굴이길쭉하고눈과입술이선적으로가늘게표현되었다.

어깨를움츠리고목을앞으로빼고있는형태에서조선시대후기인물조각의전형성을볼수있다.

능의역사

효명세자가1830년(순조30)승하하자성북구석관동의릉왼쪽언덕에

세자의무덤형식인원(園)으로능을조영하고,연경묘라고하였다.

그후효명세자의아들헌종이1835년즉위하자그를익종으로추존하고능의이름을수릉이라고하였다.

1846년(헌종13)에는풍수상불길하다는의논이제기되어천장하기로하고,

현궁을발굴하여정자각에봉안하였다.

그리고는그해5월19일에발인하여,20일에양주용마산아래로천장하였다.

1855년(철종6)8월에다시능을발굴하여건원릉좌측언덕으로천장하였다.

1890년(고종27)에는춘추83세로승하한신정왕후를수릉에합장하여모셨다.

1899년(광무3)에는익종은문조익황제로,신정왕후는신정익황후로다시추존되었다.

1대태조(太祖)의

건원릉

능호:건원릉

위치:경기도구리시인창동산4-2

지정번호:사적제193호

조성시기:1408년(태종8)9월9일

능의구성

건원릉은조선1대태조의능으로,조선왕릉제도의표본이라고할수있다.

기본능제는전체적으로고려공민왕의현릉을따르고있으나,

고려시대에는없던곡장을봉분주위에두르는등

세부적으로석물의조형과배치면에서일정한변화를보여주고있다.

석물의조형은남송말기의중국풍을거의따르고있다.

봉분에는다른왕릉들처럼잔디를심지않고억새풀을덮었는데,

고향을그리워하는태조를위해태종이고향에서

흙과억새를가져다덮어주었다는일화가전해진다.

높고웅장한봉분의아래부분은다양한문양을새긴12면의화강암병풍석이둘러싸고있다.

병풍석에는열두방향의악재로부터왕릉을보호하기위해십이지신상을새겼다.

병풍석밖으로는12칸의난간석을둘렀고,

난간석밖으로는석호와석양이네마리씩교대로배치되어있다.

석호와석양은왕을지키는영물들로,

밖을향하여언제든지방비할수있는준비태세를갖추고있다.

봉분앞에는혼유석이있는데,

혼유석밑에는도깨비가새겨진북모양의고석5개가놓여있다.

한단계아래쪽에는장명등과석마한필씩이딸려있는문석인이놓여있고,

그보다더아래쪽으로는무석인과석마가양쪽에놓여있다.

능의역사

1408년(태종8)태종은1대태조의건원릉을조성하였다.

태조는1408년5월24일창덕궁광연루별전에서74세로승하하였다.

그해6월12일검교판한성부사유한우,전서운정이양달,영의정하윤등이

원평,봉성,행주등의길지를후보지로내세웠으나채택되지못하였고,

6월28일지금의구리시인양주의검암에산릉지를정하였다.

7월5일에충청도에서3,500명,황해도에서2,000명,

강원도에서500명등총6,000명의군정을징발하여

7월말을기하여산릉의역사를시작하게하고석실을만들게하였다.

그리고는9월7일임금이백관을거느리고빈전에나아가

견전례를행하고영구를받들어발인하였다.

태조는생전에계비신덕왕후와함께묻히기를원해

신덕왕후의능인정릉(貞陵)에자신의묏자리를마련해두었다.

그러나그의뒤를이은태종은부왕의유언을따르지않고,

신덕왕후의능을도성밖으로이장하고,태조의능을지금의자리에조성하였다.

능에올라갈수없게되어있어

태조의능위에자라고있는억세풀을본보기로능밑에심어놓기도.

​능을조성당시의거북상

광무4년600여년후의거북상의변화

건원릉의옆숲을지나인목대비의오픈된목능으로가다.

14대선조(宣祖)의

목릉

위치:경기도구리시인창동산4-3

조성시기:1600년(선조33)12월22일​

​능의구성

동구릉의가장깊숙한곳에위치한목릉에는

14대선조와의인왕후박씨,계비인목왕후김씨세사람이잠들어있다.

같은능역안의각각다른언덕에왕릉과왕비릉을조성한동원이강릉의형식을따르고있다.

제일왼쪽에보이는것이선조의능이고,가운데가의인왕후,오른쪽이인목왕후의능이다.

선조의능에는3면의곡장이둘러져있고,병풍석에는십이지신상과구름무늬가조각되어있다.

여기에난간석과혼유석,망주석1쌍과석양,

석호2쌍이배치되어전형적인상설의양식을취하고있다.

의인왕후릉은병풍석이생략된채난간석만둘러져있다.

임진왜란을치른후능을조성했기때문에석물들의크기만클뿐

사실적이지도입체적이지도못하다.

그러나망주석과장명등대석에새겨진꽃무늬는처음선보인양식으로

인조장릉의병풍석에까지새겨지는등조선왕릉조영에많은영향을끼쳤다.

인목왕후릉역시의인왕후릉과같은형식을따르고있지만좀더생동감이있어보인다.

능의역사

목릉의능역은원래1600년(선조33)의인왕후박씨가승하하자

왕비릉인유릉(裕陵)의터로정해진곳이다.

1608년(광해군즉위)선조승하후선조의능인목릉은

원래건원릉의서편에조영되었는데,

물기가차고터가좋지않다는심명세(沈命世)의상소에따라

1630년(인조8)현위치로천장되고

유릉과목릉의능호를합칭하여목릉이라부르게되었다.

그후1632년(인조10)에선조의계비인목대비가세상을떠나자

계비의능을왕릉의동편언덕에조영하게되어오늘날의세능을이루게되었다.

따라서정자각도세능이들어설때마다자리를바꾸게되었다.

원래는동편의의인왕후릉앞에있었던것이후에왕릉이천장되면서

왕릉앞에정자각이서고왕비릉의정자각은헐리게되었다.

여기에계비인목왕후의능이들어서자한때왕릉쪽으로치우친정자각을

다시옮기자는주장이있었으나,

이전이번거롭다하여왕비릉은신로만정자각에접하도록하는것으로결정되었다.

따라서현재목릉의정자각은왕릉을향하여서있으면서

신로는세능으로모두뻗어있다.

​유일하게능을관찰할수있게오픈된

인목대비의능

봉분아랫부분에12각의화강암병풍석을둘렀다.

석난간은앙련으로돌리고금강저를든수호신이새겨져왕과함께하고있으며,

12각면마다수놓아진당초문과구름문조각이화려하다.

봉분뒤곡장안으로는돌로만든호랑이와양이호위하고있고,

봉분앞에는상석과화려하고장식성이뚜렷한8각장명등이놓였으며,

양옆에망주석이있는데모두정성이극진하다.

그양옆으로홀을들고읍하고선문인석과석마,

장검을빼두손으로짚고서있는무인석이늠름하며조각솜씨도뛰어나다.

능은정남에서약간서향이다

[네이버지식백과]동구릉

문인석과무인석옆에는말이​호위를하고있다.

흔히상석이라부르지만

능에있는상석은혼유석이라하여혼이노는곳이라부른단다.

혼유석을받치고있는4개의단은북모양을하고있고

앞뒤좌우로도깨비형상이새겨져있었다.

호석과마석과양석으로세운의미?

호랑이와양과말의의미!!!

인목대비의능앞에서바라본선조의능과

제사때혼령이제사에참여하기위해신로가굽여져놓인모습.

선조의능

능앞에는정자각과비각이놓여있다.

의인왕후박씨

선조의능보다낮게조성된의인왕후의능

인조의계비장렬왕후(莊烈王后)조씨

휘릉

조성시기:1688년(숙종14)12월16일

능의구성

휘릉은1688년(숙종14)조성된16대인조의계비장렬왕후의능이다.

능침은3면의곡장으로둘러싸여있으나병풍석은두르지않았다.

18대현종비명성왕후의능인숭릉을조영한지5년뒤에다시조영한능이므로

석물의형식과기법이거의비슷하다.난간석에는십이지상을새겨열두방위를표시하였다.

또한능침앞에놓인혼유석을받치고있는고석이5개이다.

태조에서세종에이르는왕릉의고석은모두5개였다가세종영릉이후4개로줄었는데,

휘릉에와서다시초기의형식을따르게된것이다.

고석에는귀신을물리치길바라는뜻에서도깨비를새겨놓았다.

능침주변의석양과석호는아담한크기에다리가짧다.

석양은다리가너무짧가배가바닥에거의닿을정도이다.

한단계아래의문석인과무석인은모두2.4m에이르는큰키를자랑한다.

문석인은이목구비가마멸되어윤곽만이남아있으나부드러운미소를띠고있고,

무석인은목이없이얼굴과가슴이붙어있고이목구비가커서답답한느낌을주지만

우직하고우람한무인의모습을잘드러내주고있다.

능의역사

1688년(숙종14)12월16일16대인조계비장렬왕후의휘릉을조성하였다.

인조의계비장렬왕후양주조씨는1688년8월26일창경궁내반원에서춘추65세로승하하였다.

8월27일에소렴하고,9월1일에대렴하였다.12월15일에발인하였다.

숙종실록14년12월15일기사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다.

장렬왕후의발인에총호사(摠護使)가재궁을받들고

빈양문으로부터명정전을경유하여나가서진발하였는데,

모시고따라간문무백관은모두걸어서따르고

임금은소여를타고흥인문밖에까지곡하며따라가서,

노제소에서절하고하직하고돌아왔다.

발인다음날인12월16일봉릉하였다.

능앞의작은내를​금천교라불린단다.

​경릉

24대헌종(憲宗)​의능

경릉​

조성시기:1849년(철종즉위)10월28일

경릉(景陵)은세개의봉분이나란히있는조선왕릉중유일한삼연릉형태이다.

제일우측의능침이헌종의것이고,가운데가효현왕후능침이며,

좌측이계비효정왕후능침이다.

이는우왕좌비의원칙에따른것으로중국등과는다르게배치되어있어

조선왕릉의특징을볼수있다.

모두병풍석은없고난간석으로세능침이이어져있으며,

각능침앞에혼유석을따로놓았다.

봉분아래가초계,중계,하계3단의구획으로이루어진영조이전의왕릉과는달리

문석인,무석인이한단에세워져있다.

문무석인의얼굴은입체적이라기보다는가는선으로조각하여평면적이지만

눈꺼풀과눈동자등은섬세하게표현하였다

18대현종의

숭릉

18대현종(顯宗)숭릉​

조성시기:1674년(숙종즉위)12월13일

능의구성

왕과왕비를하나의곡장안에모셔봉분이나란히2기로조성된능을쌍릉이라고한다.

높지않은언덕위에쌍릉으로조영된숭릉은왕릉과왕비릉모두병풍석없이난간석만으로연결되었고,

능침앞에혼유석이하나씩놓여있다.

곡장안의석양과석호각2쌍과망주석1쌍이초계를이루었고,

중계에는장명등,문석인1쌍과석마1쌍이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무석인1쌍과석마1쌍이배치되었다.

봉분앞의장명등과망주석에는인조의장릉처럼꽃무늬가새겨져있으며,

망주석위쪽에‘세호’라고불리우는작은동물조각이뚜렷하게조각되어눈길을끈다.

문석인은미소를머금고온화한모습이고무석인은입을굳게다물고눈을부릅뜨고있는절도있는모습이다.

능의역사

현종은1674년(숙종즉위)8월18일34세로창덕궁대조전양심각에서승하하였다.

그해8도의승군2,650명을징발하여숭릉을조영하였다.

12월11일에발인하여,13일건원릉남서쪽별도의산줄기에봉릉하였다.

그로부터10년이지난1684년(숙종10)에는현종의비명성왕후청풍김씨의능을조영하였다.

명성왕후는1683년(숙종9)12월5일창경궁저승전서별당에서42세에승하하였다.

12월7일에소렴하고,12월9일에대렴하였으며,1684년4월3일에발인하여4월5일에봉릉하였다.

숭릉의혈을파기위해겉흙을걷어냈을때부도를세우려했던흔적이나왔으나,

깊이가3척밖에되지않아지맥을손상하지않았을뿐아니라또한광중밖이기때문에그대로진행했다.

단의왕후(端懿王后)심씨의

혜릉

조성시기:1718년(숙종44)4월19일

​능의구성

혜릉(惠陵)은동구릉서측능선숭릉과경릉사이에조성된단릉이다.

비교적낮은구릉에조성되었으며,능역이전반적으로좁은형태이다.

석물의크기또한다른왕릉보다작게만들어졌다.

단의왕후가승하시에는세자빈의신분이었으므로,

원의형식으로단출하게지었기때문인것으로추정된다.

곡장안의봉분은병풍석없이12칸의난간석만둘러져있고,

봉분주위에는네쌍의석호와석양이교대로배치되어있다.

문석인은173cm의키에,눈을치켜뜬차가운이미지로조각되었다.

석인은문석인보다약10cm큰키에,이목구비가상당히이국적인데특히

치아를잔뜩드러내놓고웃는모습이인상적이다.

망주석역시다른능보다훨씬작은규모로만들었는데

조각된세호의좌우방향이다르게되어있다.

장명등은현재터만남아있고사라진상태이다

혼과왕의혼이걸어가는길이따로놓여있었다.

능의역사

1718년(숙종44)경종의비단의왕후심씨의혜릉을조성하였다.

단의왕후는1718년(숙종44)2월7일소생이없이

창덕궁장춘헌에서세자빈의신분으로승하하였다.

2월8일에소렴하고,9일에대렴하였다.산역은각도에서

승군1,000명을징발하여조성하였다.

4월16일에발인하여,19일현종의능인숭릉왼쪽산줄기에안장하였다.

1720년경종이즉위하자왕비로추봉하여,능의이름을혜릉이라고하였다.

경종과계비선의왕후는서울성북구석관동의의릉에같이모셔져있으나,

일찍승하한단의왕후의능인혜릉은이곳에홀로조성되었다.

6.25로인해홍살문과정자각이불타서주춧돌만남은상태였으나

1995년새로복원하여왕릉의면모를다시금갖추게되었다.​

묘역을위해준비되어있는돌들

조선태조고황제시비

登白雲峯(등백운봉)

引手攀蘿上碧峰(인수반라상벽봉)

一庵高卧白雲中(일암고아백운중)​

若將眼界爲吾土(약장안계위오토)

楚越江南豈不容(초월강남기불용)​

​손당겨댕댕이덩굴휘어잡고푸른봉우리에오르니

한암자가흰구름속에높이누워있네

만약에눈에들어오는세상을내땅으로만든다면

초나라월나라강남인들어찌받아들이지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