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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高句麗史 왜곡문제(상)

◆중국의 高句麗史 왜곡문제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上>

차이나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조선일보 국제부 池海範기자입니다.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분으로 편입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국내의 비판 강도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학자들에게 맡기고, 다만 중국측에서 전개돼 온 일련의 ‘고구려사의 중국사化’ 과정을 아는 범위내에서 소개하고, 아울러 여기에 담긴 정치 외교적 의도가 무엇인지를 짚어봄으로써, 우리의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아내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이 글은 저의 개인적 견해이며, 조선일보의 공식 입장과는 관계없습니다.)

1. 중국의 高句麗史 편입 노력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오늘자(2003년12월17일자) 조선일보 23면에는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의 학술발표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한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1995년부터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1998년 ‘古代中國高句麗歷史論叢’이란 책을 펴낸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노력이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는 한중수교(1992년) 이후 수많은 한국 관광객이 백두산을 여행하고 연변 등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 동포애를 나누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과 몇몇 과열 애국주의 인사들은 백두산 정상에 올라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가 하면 “만주는 우리땅”이란 주장을 공공연히 하던 때였습니다. 이 때문에 동북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열릴 예정이던 몇차례 한국 가수들의 공연이 중국측에 의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측 자료를 보면, ‘東北工程’이란 용어는 2002년2월부터 공식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정부 산하의 연구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은 1983년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약칭 邊疆中心/chinaborderland.com)이란 연구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변강(邊疆)이란 변경(邊境)이란 뜻으로, 육지의 국경선과 바다의 국경선을 모두 일컫는 말입니다. 또 사지(史地)는 역사와 지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이 이 연구소를 발족한 목적은, ‘중국변경사지 연구의 우수한 유산과 중화민족의 애국주의 전통을 계승 홍양(弘揚)하고, 본 조직과 전국 변강사지 영역의 학술연구를 조직·협력하며, 국가통일을 유지보전하고 변경지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공헌하기 위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국토를 지키고 국경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변강중심은 2002년2월 연구소내에 ‘東北邊疆歷史与現狀系列硏究工程’이란 5년(2002~2006년)의 연구프로젝트를 발족시켰습니다. 이것을 줄여서 ‘東北工程’이라 부르게된 것입니다.이 프로젝트는 전 국무위원 리티에잉(李鉄映)과 샹화이청(項懷誠) 등의 지도아래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3성(길림, 흑룡강, 요녕) 선전부의 협력을 받아, 모두 18명의 전문가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북공정의 주요연구내용은 고대중국변강이론연구 동북지방사연구 동북민족사연구 古朝鮮 高句麗 渤海史연구 중조(中朝/중국-북한)관계사 연구 중국동북변강과 극동러시아지구의 정치 경제관계사 연구 동북변강 사회안정전략연구 조선반도 형세변화와 그것이 중국동북변강 안정에 미치는 영향연구 등입니다.

중국은 그러면서 “이 연구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갖고있다”면서, “일부 국가의 연구기구나 학자들이 역사를 왜곡하는가 하면, 소수 정치인들은 정치목적에서 공개적으로 각종 황당무계한 논리를 선전하고 혼란을 조성한다”고 지적, 연구의 창끝을 한국으로 겨냥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2. 중국의 역사논리
중국 역사학계 내부에서 그동안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학술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무시해왔으며, 학계의 ‘이단아’로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사실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수(隨)-당(唐)과 고구려는 대등하면서도 독립적인 국가 관계에서 여러차례 전쟁을 치른 나라입니다. 특히 수나라는 무리한 고구려 공격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왕조가 멸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아마도 90년대 중후반부터) 중국은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내어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논리란, ‘통일 다민족국가’(統一多民族國家)라는 용어에 집결되어 있습니다.
통일 다민족 국가란, 용어 자체로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통일국가’란 뜻입니다. 중국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 등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란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용어 속에는 무서운 역사해석의 전략이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됩니다. 한마디로 역사를 거꾸로 해석할 여지를 포함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소급의 역사 해석법’인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55개 소수민족과 한족으로 구성된, 즉 ‘다민족의 통일국가’란, 한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55개 소수민족의 역사까지도 자기네 역사로 본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55개 소수민족 속에는 몽고와 티벳, 위구르, 하사크, 회족 등은 물론 조선족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중국은 지난 2~3년 사이에 이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중국사’에 대한 개념을 가다듬었습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中國史’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 중국 영토안에 있었던 과거 모든 민족(즉 56개 민족)의 역사는 곧 중국역사’란 것입니다. 여기에는 과거 민족간의 차이나 대립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사 민족이 다르고, 그 민족과 한족 왕조간에 흥망을 결정짓는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벌어진 지리적 위치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이면 그것은 곧 중국역사란 주장입니다. 즉 중국인들 스스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라고 불렀던 변방 민족의 역사까지도, 그들의 활동범위가 지금의 중국 영토내에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해괴한 역사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은 그리하여 한족 왕조를 멸망시킨 거란(요) 여진(금) 몽고(元) 만주족(淸)의 역사를 모두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였습니다. 아울러 이들 이민족과의 전쟁을 ‘중화민족 내부의 분쟁’이지, 외국과의 전쟁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통해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도 ‘민족 내부의 분쟁’이라고 주장할 여지를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청나라와 싸운 일본이나 구러시아, 국경분쟁을 벌인 인도, 베트남까지도 ‘중국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나중에 우기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엄연히 다른 나라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라고 우기는 모습이 마치 일본 만화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를 연상시킵니다. 아무 것이나 마구잡이로 먹어치우다가 배가 터지는 괴물 말입니다.

3. 악비(岳飛) 논쟁과 역사교육지침
지난해 중국에서는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를 ‘민족 영웅’에서 ‘충성스런 장군’으로 격하시킨 것을 두고 네티즌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악비는 금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간신 진회(秦檜)의 모함에 빠져 옥중에서 처형된 남송의 충신입니다. 중국은 그동안 악비를 ‘민족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항주(杭州) 서하령(棲霞嶺) 남쪽 기슭에 있는 악비묘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찾아가 그의 충성심을 기렸으며, 그의 묘 앞에 그를 모함한 진회상(손을 뒤로 묶은 형상)에 대해서는 ‘침을 뱉지말라’고 한 경고문구가 무색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어 그의 배신을 질타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이러한 악비를 ‘민족영웅’으로 지칭하였습니다.

그러던 중국이 지난 2002년 ‘중고교 역사교육지침’을 개정하면서, ‘악비는 더이상 민족 영우이 아니다’고 내부 역사서술 원칙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중국 교육당국이 개정된 역사교육지침을 공식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일부 내용이 유출되었습니다.
중국 교육당국이 악비를 격하시킨 것은, 악비가 맞서싸운 금나라(여진)의 역사가 타국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중국 자기네들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를 더이상 타민족과의 전쟁에서 충성심을 보인 ‘민족영웅’으로 칭송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송은 장강(長江)부근까지 내려온 여진족(금)의 위협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이같은 송과 금의 관계를 ‘민족 내부의 분쟁’ 정도로 재해석한다는 것은, 과거를 오늘의 기준으로 왜곡하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닐 수 없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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