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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대만 ‘큰 형님’ 장례식에 정치인들은 왜 갔을까? - China Inside
대만 ‘큰 형님’ 장례식에 정치인들은 왜 갔을까?

대만 ‘큰 형님’ 장례식에 정치인들은 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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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련방의 방주 천치리의 젊은 시절 모습>

지난 8일 오전 대만 대북(臺北)시 대직(大直)의 한 장례식장. 까만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까만 넥타이를 맨 남자 수천 명이 운집했다. 장례식장 주변에는 약 1천명의 정복 경찰과 수백 명의 사복 형사들이 배치됐다. 경찰은 실탄이 장착된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장례식장 전체를 포위하고 삼엄한 경계를 폈다. 장례식 2시간 전인 오전 6시부터 현장에 투입된 경찰은 카메라로 장례식 전 과정을 촬영, 통신위성으로 경찰청 본청으로 화면을 보내 형사국장이 사무실에서 TV화면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

대만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날 장례식은 대만 최대 폭력조직 죽련방(竹聯幫)의 정신적 지주 천치리(陳啓禮)의 장례식이었다. 대만 연합보(聯合報)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부터 3시간반 동안 진행된 장례식에는 40개 지방 폭력조직원 1만명이 운집했다. 또 집권여당인 민진당(民進黨)은 물론 야당인 국민당(國民黨) 친민당(親民黨) 대련당(臺聯黨) 신당(新黨) 등 모든 정파인사들도 참석했다. 정부에서는 입법원장 왕진핑(王金平)을 대신해 위텅팡(余騰芳) 부비서장이 조문했다.

천치리가 어떤 인물이기에 무장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1만명의 폭력단 조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장례식에 집결하고, 경찰은 왜 참석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로 촬영해 생중계한 것일까. 정치인들은 왜 국민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내밀었을까.

천치리는 대만 내 3대 폭력조직(중국에서는 黑社會組織이라함) 가운데 최대 조직인 죽련방의 초대 방주(幫主·우두머리)였다. 나머지 2대 조직은 사해방(四海幫)과 천도맹(天道盟)이다. 죽련방의 주요 구성원은 1만5000명이며, 말단조직원까지 포함하면 1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죽련방이 출현한 것은 1953년경. 국공(國共)내전에서 패한 국민당군이 1949년 대만으로 피신한 뒤 타이베이 시내 중화(中和) 영화(永和) 일대에 주둔하자, 주변에 군속 거주지인 권촌(眷村)이 생겼다. 국민당 군인 자녀들은 학교에서나 거리에서 대만 토박이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다. 대륙에서 건너온 이들 외성인(外省人) 중학생들이 1953년 만든 자위조직이 바로 죽련방의 전신인 중화방(中和幫)이다. 이에 맞서 1955년경 대만 토박이 부유층 청년들이 만든 조직이 사해방이다. 역시 대만 토착민 중심의 천도맹은 두 조직보다 늦은 1985년에 만들어졌지만, 해외에까지 널리 진출해 일본 야쿠자와도 손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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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련방 천치리의 부인(가운데)과 전 방주 황소령(왼쪽). 황은 중국으로 진출해 세력을 확장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천치리는 1941년 중국 강소성(江蘇省) 고순(高淳)에서 태어난 뒤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부모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했다. 천치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대만에서는 대륙 출신의 외성인과 본토인(內省人) 청년들 간에 집단 패사움이 심각했다. 천치리는 11세 때부터 중화방에 가담했다. 두목의 구속으로 한때 내분을 겪었던 중화방은 1956년 죽림로(竹林路)에서 모임을 갖고 죽림연맹(竹林聯盟·이를 줄여서 竹聯幫이라 부른다)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천치리는 죽련방의 5개 산하조직의 하나인 ‘압(鴨·오리)분대의 일원이 된다.

1962년 당시 최대 조직이었던 사해방이 범죄에 연루돼 경찰의 대대적인 소탕에 직면하자, 천치리는 조직원을 동원해 사해방을 공격,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1968년 27세의 나이에 죽련방의 총두목에 오른다. 당시 그의 친구였던 대만 상인 텐이(田毅)는 천치리가 체력이 좋았을 뿐 아니라 누구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배짱과 용기를 지녔다고 말했다. 그후 천치리는 전국 각지의 범죄조직들을 흡수, 수십개의 지방 조직(이를 堂口라고 부른다)을 거느리게 된다.

천치리의 운명은 1984년 정치테러 사건인 이른바 강남(江南)사건을 계기로 크게 바뀐다. 그 해 10월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대만 신문기자 출신 작가 류이량(劉宜良)이 자택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호가 강남(江南)인 류는 대만 총통인 장경국(蔣經國)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장경국 전기(蔣經國傳)를 펴낸 인물. 미 연방수사국(FBI)은 수사 결과 범인이 죽련방의 천치리와 우둔(吳敦),동궤이선(董桂森) 등 3인임을 밝혀내고, 대만 정부측에 범인 인도를 요구했다. 대만 측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미국 정부는 천치리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 두었던 녹음테이프를 확보해 언론에 공개했다. 테이프에는 사건 배후에 대만정보국 왕시링(汪希苓) 국장 등 최고 간부들이 개입됐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렇게 되자 대만 정부는 부득이 정보국 간부들을 체포하고, 천치리에 대해서는 다른 죄목을 씌워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천은 그 후 감형되어 1991년 석방되었지만 1996년 다시 정부의 체포령에 쫓기자 캄보디아로 도피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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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련방 천치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대만의흑세계 인물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살던 그는 대만TV와의 인터뷰에서 부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췌장암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올 8월 홍콩으로 나와 치료를 받았으나 지난 10월4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경쟁 조직인 사해방의 두목 자룬녠(賈潤年) 등 각 계파 조직원은 물론, 일본 야쿠자의 일파인 야마구치조(山口組)와 홍콩 삼합회 조직인 신의안(新義安) 및 한국·미국의 대만계 조직원들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여론을 의식, 폭력조직 지부(堂口) 이름 대신 회사직함으로 참석했다.

한 대만 기자는 흑사회 두목 장례식에 타조직원들이 조문하는 것은 관례지만, 1만 명이나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때 대만 폭력세계의 1인자였던 천치리가 외국에 있으면서도 흑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아온 데다, 경쟁조직들은 이 기회에 자신들의 존재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많이 모인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이 장례식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촬영한 것은, 범죄자나 수배자를 가려내고 향후 수사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대만 언론은 보도했다.

정치인들이 이런 장례식에 나타나면 표를 잃는 것은 아닐까? 한 대만 인사는 잃는 것과 얻는 것 중에서 얻는 것이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외성인의 폭력조직인 죽련방은 그 동안 외성인 중심의 정당인 국민당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왔고, 앞으로도 선거 때면 외곽에서 도와줄 것이기 때문에 장례식에 가지 않는 것보다 가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인들이 주변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함으로써 선거 때 이득을 보려는 것과 비슷하다는 설명이다.

대만의 폭력조직은 일본이나 한국의 폭력조직과 비슷한 존재양태를 보인다. 도시 내 일정 구역의 서비스업체들로부터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거나 직접 위락업소를 경영하기도 한다. 또 대형공사 입찰에서 특정 업체의 낙찰을 돕기 위해 경쟁업체를 협박하는 일을 맡는다. 대만 정부는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폭력조직의 두목급들을 검거하지만, 워낙 조직이 방대해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다.

최근 대만 폭력조직은 중국 대륙에 진출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한편, 한국에까지 손을 뻗쳐 해악을 끼치고 있다. 지난해부터 검찰과 국세청 직원을 사칭해 ARS(자동응답) 사기전화로 돈을 뜯어간 대만인들이 죽련방의 일원인 것으로 한국 경찰청은 파악하고 있다. 또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외국인 범죄의 70%를 차지하는 중국인(조선족 포함)범죄자의 상당수가 대만 혹은 중국의 범죄조직과 연루돼 있는 것으로 수사당국은 보고 있다.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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