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WP_Widget에서 호출한 생성자 함수는 4.3.0 버전부터 폐지예정입니다. 대신
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본문스크랩]    玉溪亭(옥계정), 玉溪舊宅(옥계구택) - China Inside
[본문스크랩]    玉溪亭(옥계정), 玉溪舊宅(옥계구택)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옥계정]

법전면 소천리 졸천 마을에 있으며 옥계 김명흠(1696-1773)선생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9년도에 건립하였다.
玉溪亭(옥계정) 또는 拙川精舍(졸천정사) 라고도 한다.

운곡천의 맑은 물과 소나숲, 넓은 바위 등 주변 경관이 뛰어나
지역 주민이 많이 찾고 있으며, 민물 어종이 풍부하다.

특히 이 일대에는 사미정과 옥계정, 창애정 등 정자가 많다.


[옥계정 내부]

김명흠은 漢基(한기)의 아들로 안동사람이다.
본관, 義城(의성) 자, 伯諧(백해)이다.

선생은 13세에 趙德後(조덕린)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선생의 일언일동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 새겨서 文詞(문사)와
句讀(구독)을 익힐 뿐만 아니라 體行(체행)하기에 힘썼다.

선생이 遠方(원방)에 유배되어 公(공)이 슬퍼하여 伸寃(신원)하기에
고심했고 식량을 보내어 가족의 생계를 돕고 선생이 졸 한 후에는
後事(후사)를 극진히 돌보아서 人倫(인륜)에 돈독하고 겸허하여
독실한 實德(실덕)의 제자로서의 모범이 되었다.


[옥계정]

옥계 김명흠은 학문에 정진한 학자인 동시에 효자로 이름났으며
출천지효로 감찰직에 추대되었다.

의성김씨 문중에서 그의 학덕과 효행을 추모하여 화장산에 건립하였는데
1939년 이곳으로 이건하였다한다.


[옥계정, 졸천정사 현판 글씨]

하늘도 감동한 그의 효성

부모에 대한 효성은 남달랐으며, 몸소 물고기 잡고 사냥한 것을
손수 삶아서 익혔으며, 아침·저녁으로 쌀을 계량하고 땔감을 측량해서
서늘한 절기와 따뜻한 절기에 알맞게 하였다.

부모님께서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거나 하시고자 원하는 것이면
비록 가난한 상황에 있더라도 반드시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준비하여 그 뜻에 맞추었다.

한 해의 옷을 만들 재료도 별도로 구분하여서 비록 자신은
입지 못하는 경우에도 부모님만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많이
준비해 드렸다.


[뒷담옆에 핀 무궁화]

하루는 부친 김한기가 노비를 시켜 집 앞 개울에 魚梁(어량)을
만들게 하여 설치하도록 하였으나, 반나절이 되도록 설치가 되지 않았다.
마침 김명흠이 어머니의 묘를 가려다 이를 보았는데,
추운 날씨에 오래 밖에 계시다가 병에 걸릴까 걱정이 되었다.

이에 추운 날씨인데도 옷을 벗고 어량을 머리에 이고 강에 들어가
어량을 완성하였다.

또 하루는 겨울에 부친이 잉어가 드시고 싶다고 하자,
직접 얼음을 깨고 그물을 던져 잉어 2마리를 잡아서 부친에게 올렸다.
그의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玉溪舊宅(옥계구택)]

부친상을 당한 이후 여묘를 살았는데, 산이 매우 깊어 호랑이가 많았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눈을 쓸고 성묘하려고 하는데, 상석 아래에
호랑이가 누워 있었다.

김명흠이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자, 호랑이가 느낀 바 있었던지
그냥 가버렸으며, 그후로는 3년상을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한다. 지극한 그의 효성에 짐승도 감동한 것이라한다.


[옥계고택 대문]

김명흠은 평소에 홍시와 山芥(산개)를 먹지 않았다.
그것은 부친께서 병중에 드시고 싶어 하신 것인데도 시절이 아니라
구해 드리지 못했던 이유로 차마 먹지 못하였다 한다.

또 죽는 날까지 비록 산에서 나는 풀과 숲 속에서 나는 것이라도
제사상에 올리지 않고는 먹지 않았다.

그의 효성은 이처럼 남다른 바가 있었다.
특히 양친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부모와 동갑인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안부를 물었다.


[玉溪舊宅(옥계구택) 2]

김명흠이 살던 동네에 요역의 부담이 만만치 않아 모두 괴로워했다.
이에 그 문제를 김명흠에게 주관하도록 하자, 그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동네 공동 소유의 田舍(전사)를 마련하여, 이후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요역을 부담하자 온 마을 주민이 그 혜택을 입었다.


[玉溪舊宅(옥계구택) 3]

무신난이 일어나자 조덕린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조덕린의 명을 받아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현재 수리중이어서 고택이 좀 어수선하였다.
말끔히 잘 단장하여 오래 오래 후손들도 함께하길 소원해보았다.


[동미쏘??]

어떤 스님이 뒤로 넘어져 죽은 곳이라하여 중쏘 또는 동미쏘라 불렀다.
100여년전만해도 깊이를 알수 없었으나 지금은 얕은 천에 불가하며
주변경치가 수려하여 여름철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한다.

확실한 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료를 찾다가 보게된 곳이라
혹시나 이곳이 아닐까 하고 적어올려보았습니다.
아니다, 기다 하지 마시구요. 그러려니 하고 함께 느껴보셔요.

[사진. 글 / 草阿(초아) 박태선]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