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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황장엽 망명동지’ 김덕홍씨, 8년만에 입열다

"黃 前비서, 내 형님이지만 노선달라… 北 문제에 마지막까지 ‘주체’ 집착"
그는 중국식 개혁 원했고 난 민주주의로 北해방 주장
그래서 우린 결별했고 결국 빈소에도 못갔다… ‘현충원 안장’ 정부에 감사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 동지’인 김덕홍(72) 전 북한 당중앙위 자료실 부실장은 지난달 황씨 빈소에 조화만 보내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2년 방미(訪美) 문제로 황 전 비서와 갈등을 겪다 결별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탈북자동지회에서도 모습을 감췄다. 이를 두고 무수한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2004년 여권 발급을 거부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4년 뒤 5000만원의 위자료 지급 판결을 받아냈다. 본지는 그 소송을 단서로 수소문한 끝에 지난 4일 김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인터뷰는 서울 시내 모처에서 경찰 소속 경호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졌다. 황 전 비서와의 결별 이후 그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다.

1997년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탈북한 김덕홍씨가 4일 서울 모처에서 황장엽씨 사후 소회와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요즘 어떻게 지내나.

"대한민국 정부가 배려하고 신변을 보호해줘 정상적인 사업과 생활을 하고 있다."

―황 전 비서 빈소에 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장례위 이철승 고문에게 편지로 보냈다. 인간적 견지에서 그는 나의 형님이었지만 상(喪)을 개인적으로만 접할 수 없었다. 그는 북한인민 고통의 원인인 ‘주체사상’의 원천이고, 북한 자유투사들의 엄정한 투쟁 대상이다. 그들과 뜻을 같이해 투쟁하는 나로서는 갈 수 없었다."

―2002년 황 전 비서와 결별했다고 알려졌는데.

"북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왔는데 이념이 달라 서로 불편했다. 그는 주체사상에 집착했다. 그는 중국식 개혁·개방을 주장했고, 나는 대한민국을 모델로 한 자유민주주의로 북한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벤츠(주체사상)는 완전무결한데 운전자가 잘못해서 전복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결연 당시 수차례 편지가 오갔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이 문제는 북한이 해방돼 김일성·김정일 범죄조사위가 발족하면 그때 모두 밝히겠다."

―황 전 비서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와 원로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찌 됐든 그는 북한을 등졌고, 그의 망명은 남한의 정치적 승리였다. 그로 인해 남한이 가진 북한 정보 수준도 완전히 달라졌다. 그 공로를 인정해준 점에 인간적으로 감사한다."

父傳子傳… 한손으로 술 따르는 김정은… 북한 조선중앙TV는 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계자 김정은이 지난 10월 당 창건 65주년을 맞아 새로 건설된 국립연극극장을 돌아보고 새 주택에 입주한 예술인들의 가정을 방문했다는 내용의 기록영화를 보도했다. 김 위원장(왼쪽)과 김정은(오른쪽)이 한 손으로 예술인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다. /조선중앙TV 연합뉴스

―황 전 비서와 망명한 계기는.

"1996년 4월 황장엽은 모스크바에서 주체사상 국제토론에 책임자로 참석했다. 그는 김정일에게 ’10월 혁명의 포성을 처음 울린 러시아에서 주체의 포성을 쏘았다’고 보고했다. 김정일은 만족해 그와 식사도 함께 했다. 그런데 2~3개월 뒤 러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통보가 왔다. ‘황장엽이 북한 주체사상의 원천은 자기라고 자랑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정일이 성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황장엽 제자들은 사상투쟁에 불려갔고 하나 둘 죽어나갔다. 김정일이 곧 자기를 문제 삼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내게 독약을 구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값없이 죽을 바엔 남(南)에 가서 민주화운동을 하자’고 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는 ‘그럼 네가 준비를 해보라’고 했다. 이후 대한민국 관계기관이 움직였다."

―망명을 권유한 이유는.

"북한 인민들의 고통은 주체사상에서 비롯됐다. ‘김일성 공산왕조체제’를 설계한 사람은 황장엽이다. 배는 그것을 설계한 사람만이 폐선할 수 있다.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키려면 그 원천인 황장엽을 데리고 정치망명해야 한다는 북한 동지들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다."

―죽을 각오를 했을 텐데.

"나는 원래 제3국에 남으려고 했는데, 그가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간다’고 했다. 운명이 그렇게 되도록 움직였다. 망명이 다가오면서 일주일간 잠을 잘 수 없었다. 내가 죽을 각오를 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멸문지화가 되겠구나 생각하니…. 망명 후에도 한동안 잠을 못 잤다."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나.

"알 수도 없지만, 안다고 해도 발설하고 싶지 않다."(그는 북한에 1남3녀를 두었다.)

―황 전 비서와의 인연은.

"그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왔을 때, 나는 김일성대 교무지도원으로 있었다. 황장엽 아래서 당중앙위 주체사상연구소 부과장, 당중앙위 자료실 부실장을 했다. 당에 들어왔을 때 그가 ‘앞으로 우린 형제간이야’라고 했고, 망명한 다음 날 ‘형님, 동생으로 부르자’고 했다."

―북한에 반 김정일 세력이 있는가.

"북한의 당과 군(軍), 온 사회에 반감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진 못하고, 들키지 않기 위해 3~5명 정도의 소조직으로 활동한다. ‘김일성 공산왕조’와 이해관계를 가진 자는 오직 ‘김일성 족속’뿐이다. 김정일 사망은 급변사태로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돼 있다."

김진명 "김정일 죽으면 중국이 북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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