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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에서 신라승 원측과 혜초의 숨결을 느끼다

[중국속의 한국사기행(4)/조선일보 2010년 10월 29일자 중국특집섹션]

중국 서안에서 신라승 원측과 혜초의 숨결을 느끼다

서안=지해범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

고유민 중국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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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흥교사에 있는 원측 사리탑. 2008년 사천성 대지진으로 손상을 입어 수리중이다./사진=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이들 군인과 정치인의 발자취가 역사서에만 남아있는 것과 달리, 신라 출신 승려들의 활약상은 여러 사찰에 유적으로 남아있어,이곳을 찾는 후손들에게 자부심을 갖게한다. 서안시 중심지에서 남쪽 종남산 방향으로 30여분을 달리면, 인진(引鎭)이란 지역에서 흥교사(興敎寺)를 만난다. 이 사찰에는 유식(唯識)불교로 유명한 신라 출신 원측(圓測·613~696)의 탑이 남아있다.

경주 모량리에서 태어난 원측은 15세 때 당으로 유학을 가서 원법사에서 유식학을 배웠다. 어학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인도로 유학을 가지는 못했지만 중국어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티벳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당 태종에 의해 서명사(西明寺)의 대덕(大德·덕망이 높은 승려)에 임명된 원측은 ‘반야심경찬’ ‘인왕경소’ ‘해심밀경소’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으며, 이중 해심밀경소는 티베트 대장경에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실릴만큼 인정을 받았다. 여황제 무측천(武則天)도 불경번역의 총책임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실력이 뛰어나면 현지인의 시기를 받기 마련. 원측은 ‘서유기’에까지 등장하는 당대 최고승 현장법사가 번역한 ‘반야심경’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지적하자, 현장의 제자인 규기(窺基) 일파가 강하게 반발했다. 확인결과 원측의 지적이 정확했음이 밝혀졌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원측은 종남산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칩거했다. 후에 원측이 낙양(洛陽)의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화엄경’을 번역하던 도중 입적하자, 그의 제자들은 규기 일파의 해코지를 우려해 종남산 풍덕사에 사리탑을 세워 그의 분골과 사리를 안치했는데, 훗날 송(宋)대에 지금의 흥교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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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 사리탑 맨 아래에 놓여진 원측상. 송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흥교사 뜰에는 가운데 현장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왼쪽에 원측, 오른쪽에 규기의 탑이 세워진 것을 두고, 두 학파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난 19일 이곳을 찾았을 때 3개의 사리탑은 2008년 사천성 대지진으로 입은 피해를 보수중이었다. 탑 맨 아래에는 송대에 만들어졌다는 원측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흥교사의 한 승려는 “적지않은 한국인이 이곳을 찾는다”며 보수공사는 내년에나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원측과 관련된 다른 자료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국가의 높은 분들이 아니면 공개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서안시 남2환 부근의 천복사(薦福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는 세계적인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慧超·704~787)가 활동했던 곳이다. 16세 때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그곳에서 인도의 고승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인도유학을 권유받고, 723년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해 인도 각지와 중앙아시아를 두루 여행했다. 인도에서 돌아온 혜초는 천복사에서 불경을 번역하며 초기 인도밀교(密敎)를 공부하고 포교하는데 힘썼다.

천복사 내에는 684년에 세워진 14층 소안탑(小雁塔)이 있는데, 좁은 계단을 밟아 꼭대기까지 오르다 보면, 그 옛날 구도의 일념으로 이곳을 올랐을 혜초의 숨결이 느껴지는듯 하다. 혜초는 스승 금강지가 죽자 대흥선사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는데, 현재 불사가 한창인 대흥선사의 금강당에는 혜초 등 신라고승으로 추정되는 불상 2개가 조성돼 있다. 사찰 관계자는 “이전 주지가 여러 고승들의 상을 조성하면서 신라 승려 2명의 불상도 만들었지만, 고증이 끝나지 않아 미처 이름을 새겨넣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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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가 수행했던 서안 천복사의 소안탑./사진=지해범 중국전문기자>

774년 당 황제 대종(代宗)은 가뭄이 이어지자 장안의 고승들 가운데 혜초에게 기우제를 지내는데 필요한 글을 쓰게 했는데, 혜초가 선유사 옥녀담에서 제단을 세우고 향을 피운 뒤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를 올리자 하늘에서 비단같은 보슬비가 흡족히 내렸다고 전한다. 옥녀담은 현재 물에 잠겼는데, 1998년 이곳을 답사한 변인석 아주대 교수의 주도로 2001년 혜초기우제평이라 새겨진 바위 옆에 ‘신라국혜초기념비’가 세워졌다. 서안에서 서쪽으로 80여㎞ 떨어진 흑수곡(黑水谷)이란 곳에 있다. 원측과 혜초는 왜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당에서 생을 마쳤을까. 혹시 신라는 이들을 포용할 환경이 미흡했던 것은 아닐까? 요즘 한국으로 돌아오길 꺼리는 일부 해외 두뇌들처럼…

원측과 혜초 외에도 자장(慈藏) 의상(義湘) 무루(無漏) 현범(玄範) 지인(智仁) 혜소(慧昭) 승장(勝庄) 등 많은 신라승들이 당에서 활동했고, 이들은 안강(安康) 서북쪽에 ‘신라사(新羅寺)’라는 사찰까지 세웠다. 지금 신라사 터에는 초석만이 남아있다.

당에서 활약한 신라인으로 최치원(崔致遠)과 김가기(金可紀)를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은 당에서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합격해 관리가 되었다. 외국인도 실력만 있으면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한 당나라의 개방성이 놀랍다. 이중 김가기는 짧은 관리생활을 접고 종남산의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한 채 도교에 매진하여 높은 경지에 올랐는데, 황제가 부르자 승천을 이유로 불응했다고 한다. ‘태평광기’라는 책에 따르면, 김가기는 죽음에 이르자 관리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옥황상제가 보낸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서안시 장안구 자오진에서 김가기 마애석각이 발견되었다. 서안 초당진(草堂鎭)에는 고구려 유민 집단 거주지로 추정되는 ‘고력거촌(高力渠村)’이 있다. 당대 고구려유민의 집단거주지를 ‘고려곡’이라고 불렀는데, 일부 학자들은 ‘고력거’를 그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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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력거촌/사진=서안총영사관 제공>

옛날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던 서안은 현재 인구 800만명(유동인구 포함 1000만)에 중국 서북부의 경제중심지로 도약하고 있다. 서안총영사관의 전태동 총영사는 “중국 중서부개발의 거점도시중 하나인 서안은 관광산업 외에도 항공우주산업과 IT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서안~정주간 고속철도가 우루무치까지 연결되면 서안은 ‘신실크로드의 중심도시가 될 것”이라며 한국기업의 관심을 촉구했다./계속/hbjee@chosun.com

2 Comments

  1. 풀잎사랑

    2010년 11월 11일 at 2:41 오후

    아뉘,,,
    한국사람이 우리의 원측에 관해 물어를 보는데 웬 국가의 높은 분을 운운한답니까요?
    정말 때국넘 심뽀구만유.ㅎㅎㅎㅎㅎㅎ

    서안을 보고 온 사람의 말을 듣고선 우습게봤더니..
    우리 조상님들의 활약이 대단한 곳이였네요.
       

  2. 지기자

    2010년 11월 11일 at 4:09 오후

    한국사람들이 중국 가서 자꾸 한민족의 자취를 물어보고 찾아가야, 중국인들도 그런 것이 있는줄 알겠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인 대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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