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은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go away like a morning dew)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leave a trace of my life)"라고 했다.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vanish away like a wisp of smoke)…. 묻지 마라 왜냐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조지 남궁(68)씨는 어린이를 위한 구호활동(famine relief activities) 재단 ‘Kids of Kilimanjaro’ 를 운영 중이다. 아프리카의 1만3000명 학생들에게 매일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삶(a life of vicissitudes)이 그를 킬리만자로로 이끌었다.
남궁씨는 194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조부모가 상하이의 한국 망명정부에 합류(join the Korean government-in-exile)했을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to help feed the starving) 매일 대문 근처에 쌀이 담긴 양동이 하나를 놓아두었다(keep a bucket of rice near the front door).
1949년 공산당 승리로 내전이 끝나면서 중국은 혼돈상태에 빠졌다(sink to a state of chaos). 가족들은 홍콩으로 도피(flee on for Hong Kong)했다. 3년 뒤 다시 일본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hop a freighter to Japan). 중공군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be widely rumored).
영어로 말하는 ‘조센진’ 아이는 일본에서 숱한 고난과 차별을 겪어야(go through lots of hardships and discriminations) 했다. 그러나 꿋꿋이 버텨낸(take a firm stand) 그는 대학 졸업 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work day and night). 초주검이 돼(be all but dead) 병원 신세를 진(end up in the hospital)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30여 년 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마케팅회사와 판촉용 장난감(promo toys) 생산업체를 차려 많은 돈을 벌었다(rake in the money). 캘리포니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an aristocrat of wealth)가 됐다.
킬리만자로재단을 설립한 것은 6년 전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가 굶주리는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a sorry sight of starving children)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맨손으로 큰 재산을 모은(make a fortune starting from scratch) 독립운동가의 손자가 기아로부터의 해방(the freedom from famine)을 위해 여생을 바치도록(devote the rest of his life) 한 것은 60여년 전 부모님이 대문 앞에 놓아두셨던 쌀 양동이에 대한 기억이었다.
☞윤희영의 News English가 책으로 출간됐습니다.’윤희영의 뉴스 잉글리시 NEWS ENGLISH’ 샘터에서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