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나 다름없던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준 사람들의 은혜에 그 ‘원수’가 65년 만에 전 재산을 털어 보답한다.
올해 84세인 독일인 하인리히 스타인메이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전쟁 기계’에서 가장 광적이었던 사단들 중 하나에 속한 나치 돌격대원(a Nazi stormtrooper in one of the most fanatical divisions in Hitler’s ‘war machine’)이었다.
- ▲올해 84세가 된 스타이마이어
그는 2차 대전 말기(towards the end of World War Two)인 1944년 노르망디의 진흙투성이 참호에 숨어 있다가 며칠 째 이어진 영국 공군의 집요한 폭격을 당한 뒤(after being relentlessly bombarded for days in his muddy Normandy foxhole by the Royal Air Force) 영국군에 투항했다(surrender to British troops).
어떤 자비도 기대하지 않았다(expect little mercy). 하지만 그를 포로로 잡은 영국군, 전쟁이 끝날 때까지(until the end of the war) 머물렀던 포로수용소 경비원들(the troops who captured him and the guards at the prison camp)은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treat him with humanity)줬다.
65년이 지난 지금(now 65 years on) 그 독일군은 그 곳에서 받았던 대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as a gesture of gratitude for his treatment there) 스코틀랜드 퍼스셔주(州)의 작은 마을 콤리의 노인 주민들에게(to early residents in the tiny village of Comrie, Perthshire) 40만 파운드(약 7억6000만원)의 전 재산을 증여키로(bequeath his all equivalent to 400,000 pounds) 했다. 자신의 집과 3만 파운드(약 5600만원)의 노후대비저축금을 모두 내놓기로(leave his home and life savings of 30,000 pounds) 했다.
- ▲65년 전 나치 돌격대원 때의 스타이마이어
스타인마이어는 소속 부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연합군에 의해 궤멸된(be decimated by the allies during the D-day landings) 후 열성 나치들을 수용하기 위해 특별히 지어진(built specially to house ardent Nazis) 컬티브래건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다.
증오스러운 적군으로 대우할 것으로 예상했지만(expect to be treated as a hated enemy) 경비원이나 마을 주민들은 따뜻하게 그를 보듬어주었다. 그 은혜에 감복한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7년간 그 곳에 머물기로 결정(decide to remain there for seven years after the war)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폴란드의 일부가 된(become a part of Poland) 것을 알고 난 뒤 콤리 마을에 남아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stay in Comrie and work as a farmhand). 그는 자신의 나치 전력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despite making no secret of his Nazi past) 마을 주민들이 보여준 친절함에 너무나 놀랬다(be stunned at the kindness of local residents)고 한다.
한 번은 마을 하일랜드게임(스코틀랜드 전통 스포츠축제)이 열려 어렴풋이나마 엿보려고 언덕에 올라가 서 있었다(stand on a hill to catch a glimpse). 그랬더니 한 여성이 다가와(come up to him) 들어가서 볼 수 있는 티켓(a ticket to go in and watch), 뿐만 아니라 용돈으로 10실링짜리 지폐까지(not only that, but a ten shilling note as well to spend)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또 주민들은 스타인마이어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fall ill) 소식에 독일에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소포들을 보내주기도(send parcels to his mother in Germany) 했다. 스타인마이어는 “사람들이 그렇게 좋을 수도 있다는(could be so nice) 사실에 너무나 놀랬다(be utterly astonished)”고 한다.
그는 “포로수용소 주변 전체(the whole place around the prison camp)가 너무나 아름다웠다”며 “내가 왜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싸우고 있나(fight the bloody war)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go to my heart)”고 회고했다.
- ▲컬티브래건 전쟁포로수용소 모습
현재 독일 브레멘에 살고 있는 스타인마이어는 “나는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관대함에 보답하기를 늘 원해(always want to repay the generosity they showed me)왔다”며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주어야 할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deserve everything I have to give them). 다른 어느 누구보다 그들이 갖는 것이 훨씬 낫다(be far better they have it than anyone else)”고 말했다.
스타인마이어가 사망하면 그의 유골은 컬티브래건 포로수용소 자리에 뿌려질(his ashes will be scattered at Cultybraggan Prisoner of War camp) 예정이다. 그의 재산은 지역 노인들을 돕기 위해 그가 설립한(set up to help the elderly in the area) 특별신탁기금에 넘겨지게(be passed to a special trust) 된다.
‘하인즈’라는 별명으로 스타인마이어를 기억하고(remember Mr. Steinmeyer by his nickname ‘Heinz’) 있는 콤리 마을의 노인들(elderly residents of Comrie)은 마을에 대한 그의 놀라운 보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do not conceal their delight about his amazing requital of kindness to the village) 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27일(현지시각)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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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9일 at 1:56 오후
전쟁이란 정말 참혹하고 덧없는 거 같아요. 하지만 이런 훈훈한 인간미도 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