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독일놈 자식들’(so-called ‘Boche babies’)-점령 적군의 사생아들(the illegitimate offspring of occupying enemy troops)-이 가족 비밀에 대해 처음 공개적으로 밝히는가(speak openly for the first time about their family secret) 하면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독일 아버지들을 찾아(hunt for long-lost German fathers)나서고 있다.
- ▲ 니봐 세베스트르.
이들은 모두들 같은 이야기를 한다(everyone tells the same tale). “내 인생엔 빈 자리가 있다(a hole in my life). 나의 반쪽(half of me)이 빠져있다(be missing)”고들 말한다.
‘전쟁 고아’들 중 일부는 지난 2005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병사들에 관한 약 1800만 건의 색인카드(some 18 million index cards on World War II German soldiers)가 보관돼 있는(be stored) 독일군 문서보관소를 방문하고 온 뒤 전국전쟁피해아동협회(ANEG)를 설립했다.
현재 이 협회는 335명의 회원을 갖고 있으며, 130명 이상의 회원들이 독일 내 아버지 가족들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help more than 130 of the members locate paternal families in Germany). 소수(a handful)이기는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be still alive) 아버지를 만난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1940년 5월~1944년 12월 독일군 점령기간 중(during the German occupation between May 1940 and December 1944) 대략 20만명의 프랑스 아기들(as many as 200,000 French babies)이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난(be born to illicit liaisons)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물론 입증은 불가능(be impossible to verify)한 수치다.
한 예로 ANEG 회장인 니봐 세베스트르의 사연은 ‘독일놈 자식’의 전형적 이야기다(be a typical). 1941년 그녀의 엄마 나이 16세였을 때다. 노르망디의 한 바에서 일하던 그녀 엄마는 베르너라는 젊은 독일 병사(a young German soldier called Werner)를 만났다.
니봐 세베스트르는 이듬해인 1942년 태어났다. 그리고 2년 뒤 그녀의 엄마는 연합군 폭격에 목숨을 잃었다(be killed in the Allied bombardment). 엄마 가족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 때문에 그녀를 내쫓았고(spurn her because of what have happened), 그녀는 수양 어머니에 의해 키워졌다(be brought up by a foster mother).
그녀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세 때. 친구에게 “내 신분증에는 왜 ‘아버지 미상’(father unknown)으로 적혀있느냐”고 물었고, 친구는 “네 아버지는 독일인”이라고 말해줬다. 그녀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everyone knows in the village except her) 것이다.
충격적인 쇼크(a shocking blow)였다. 나중에 엄마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인이었으며, 금발에 키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한다. 외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something of an extrovert) 하모니카를 불 줄(play the harmonica and walk on his hands) 알고 물구나무 서서 걷기를 할 수 있던 남자였다.
그녀는 2003년 독일군 문서보관서를 접촉한 첫 사람들 중 한 명(be among the first to contact the German army archives)이었다. 이후 1941년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 주둔했던 독일군 병사들의 자취를 추적하기 시작(set out to trace German soldiers)했다.
몇몇을 찾아냈다. 일부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딱 필요한 것을 주지는 못했다(sadly none fits the bill). 동부전선에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것 외엔 찾아낼 수 없었다.
- ▲마리 크리스틴느 펭정.
그녀의 아버지 쇼버는 대담하게도 펭정의 어머니 아파트로 이사를 해(take the bold step of moving into Pengeon’s mother), 상관들의 빈축을 샀다(be frowned on by his superios).
1944년 생말로(Saint-Malo) 항구에 배치됐던 쇼버는 자신의 아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그는 휴가 허가증을 위조해(forge a permit of leave) 파리로 갔고, 결국 체포돼 독일에 보내져 처벌을 받게(be caught and sent for punishment in Germany) 된다. 이후 펭정 모녀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never see him again).
펭정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결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never speak of it) 할머니가 사실을 말해줬다. 어머니에겐 금지된 대상(a forbidden subject)이었던 것이다.
펭정은 2004년 프랑스 주둔 독일군에 관한 한 TV 프로그램을 본 뒤 독일군 문서보관서와 접촉하기(get in touch with the German army archives) 시작했고, 어느 정도 아버지에 관한 사실을 알게(learn the truth about her father) 됐다.
독일로 강제 귀국 조치된 그녀의 아버지는 감옥에 수감됐다가(be imprisoned) 탈옥을 시도했다. 그는 다시 재판을 받고 탈주 혐의로 기소돼 처형(be tried again, convicted of desertion and executed)됐다.
그가 탈옥을 기도한 것은 파리에 있던 자신의 딸 때문(because of his daughter in Paris)이었다. 재판 기록에도(in the minutes of the trial) 그는 아이를 보러 가려(want to go and see his child) 했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었던 것. 결국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던(cost him his life) 것이다.
얼마 전 펭정은 아버지 가족과 연락이 닿아(be put in touch with her father’s family) 지금은 그들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be embraced as one of their own family). 그녀는 독일에 배다른 형제(a half-brother)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돼 지금은 가깝게 지내고 있다.
엘리안느 트렝칼의 사연은 훨씬 더 흐뭇하다(be even more heart-warming). 그녀는 사실 종전 2년 뒤 태어났다(be in fact born two years after the war ended). 그녀의 아버지 오토는 독일군 전쟁포로(a German prisoner of war)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전쟁 고아로 여긴다(consider herself a war orphan). 학교에서 똑같은 희생을 당했기(suffer the same victimization at school)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더러운 독일X’(dirty boche) 소리를 들어야 했다.
트렝칼의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하던 젊은 독일군 전쟁포로와 사랑에 빠졌다(fall in love with a young German POW). 그러나 현지 사람들이 알게 돼(locals find out) 그 커플을 고발을 하게(denounce the couple) 된다.
오토는 체포돼 다른 지역으로 압송되고(be arrested and taken away to another locality) 말았다. 당시 트렝칼의 어머니는 이미 임신 중이었지만, 오토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떠나갔다.
훗날 트렝칼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물었지만, 끝내 대답해주지 않았다(refuse to tell her). 금기 대상(a taboo subject)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2001년 어느 날 트렝칼은 어머니에게 아버지 이름만이라고 알려달라고 설득했고, 독일 여기 저기에 편지를 내 아버지 소재를 수소문(send letters inquiring here and there)했다.
그리고 마침내 답장 한 통이 날아왔다(get a letter back). 아버지인 오토 본인이었다. 부녀는 이듬해인 2002년 처음 상봉했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그를 만나고 있다.
아버지 오토에겐 엄청난 놀라움(a huge surprise)이었다. 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have no idea his daughter exists)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한 번 보자마자(as soon as he takes one look at her) 말했다. “부인할 수가 없구나(can’t deny it). 너는 분명히 내 딸(be obviously my daughter)”이라며 부둥켜 안았다.
트렝칼의 어머니는 1946년 오토가 옮겨간 농장에 편지를 썼지만, 가슴 아프게도(poignantly) 농장 주인(the farm-owner)은 어떤 우편물도 전해주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be under instructions not to pass on any mail) 상태였다.
그리고 거의 60년이 흐르도록(nearly 60 years later) 오토는 왜 자신의 연인이 연락을 하지 못했는지(fail to contact him) 알 수 없었다. 트렝칼에 따르면 오토는 당시 연애가 그저 단순한 외도가 아니었다(the affair was not a fling)고 말한다.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왔더라면 결혼했었을 것(would have married if she had come after him)이라고 한다.
트렝칼은 “아름다운 결말(a beautiful ending)이 났지만 그 것은 어린 시절 겪었던(go through as child) 온갖 고통의 보상(just a recompense for all the misery)에 불과하다”며 눈물 짓는다.
최악의 경우(in the worst cases) 전쟁 고아들은 바퀴벌레를 먹거나 자신의 오줌을 마시도록 강요 당하기도(be obliged to eat cockroaches or drink their own urine) 했다.
묘한 일이지만(oddly enough) 가장 잔혹했던 사람은 바로 그들의 어머니였다. 한때 독일인 병사와 로맨틱한 연애를 즐겼다가(enjoy the romantic affair for a while with a German soldier) 이후로 줄곧 당시를 상기시키는 살아있는 존재(due to a living reminder of it later on)와 사는 고통을 겪다 보니 그 자식에게 냉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인식
2009년 3월 8일 at 5:44 오전
배트남이 따이안 하번 크게 다루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