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남 주상절리군 [慶州陽南柱狀節理群]
2012년 9월 25일에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공유수면 일대에 위치한 주상절리군이다.
주상절리군은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당시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낮은 곳으로 흘러 급랭하면서 수축되었는데, 이 때 만들어진 육각 또는 오각 기둥 모양의 수직단열이다.
이곳 해변에는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1.7㎞에 걸쳐 주상절리 전 구간을 산책할 수 있는 파도소리길이 조성되어 있다.
해설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던 교량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된 것을 2018년 4월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복원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63-1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교량(橋梁)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증을 거쳐 2018년 4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 10.28일에 다녀 옴. 해설은 안내서 및 다음백과에서 발췌함)
소인 無頂은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역적으로 몰려 사사(賜死)된 금성대군의 20세손이다. 당시로 봐서는 역적의 자손이었지만 그분이 자랑스럽다. 그분의 의로운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정권 찬탈의 불의를 보면 못 참는 형이다. 그 당시 금성대군의 자손들은 역적으로 몰려 숨어 숨어 살아 자손들이 번창하지 못했다.
다행히 1738년(영조 14) 신원(伸寃)되어 281년만에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나서 영월 창절사, 순흥 성인단, 청안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지난 8월 영주에 문화 답사를 갔다가 우연히 ‘금성대군 신단’을 보고 왔다. 그때 담은 영상을 중심으로 금성대군을 소개하고자 한다.
금성대군 [ 錦城大君 ] : 1426~1457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 순흥에서 유배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관노의 고변으로 사사되었다
이름은 유(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으로 봉해지고, 1437년 자식이 없는 방석(芳碩)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1)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후 유배된 순흥(順興)에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하여 군사를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고 하였으나, 거사하기 전 관노의 고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세종의 아들 8명 중 수양대군의 모반에 반발하여 분기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분의 사당 청당사(靑塘祠)는 나의 고향에서 1Km 정도 떨어진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에 있으며, 금성단 (錦城壇)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금성대군이 처형된 곳에 세워진 단이다.
청주 금성대군 제단 (淸州 錦城大君 祭壇)은 충청북도 청주시 미원면 대신리 산 49번지에 있으며 2005년 8월 12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말티고개 또는 말티재는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속리산의 언덕으로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 산5-12번지에 해당된다. 고려태조 왕건이 속리산을 오르기 위해 길을 닦았다 하며, 현재의 말티 고갯길과 속리산 등산로는 1924년 당시 충청북도 지사 박중량이 정비한 것이다. 보은읍내에서 약 7km 지점에 있으며 속리산 입구에 위치한 언덕으로 높이는 해발 430m에 해당된다.
충청북도 보은의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정이품송이라는 소나무가 있다. 600년 정도 묵은 이 나무는 마치 거대한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우아한 모습을 자랑한다.
1464년 조선의 세조 임금이 앓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법주사로 가던 중이었다. 임금 일행이 이 소나무 곁을 지나려는데 가지가 늘어져 임금이 탄 연(가마)에 걸리게 되었다. 이를 본 한 신하가 연이 걸린다고 소리를 치자,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임금 일행을 무사히 지나가게 하였다.
며칠 후, 법주사에서 돌아오던 임금 일행은 다시 이 소나무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세조는 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세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겨 소나무에 정이품(지금의 장관급)이라는 큰 벼슬을 내리고, 그 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정이품송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