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 無頂은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역적으로 몰려 사사(賜死)된 금성대군의 20세손이다. 당시로 봐서는 역적의 자손이었지만 그분이 자랑스럽다. 그분의 의로운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정권 찬탈의 불의를 보면 못 참는 형이다. 그 당시 금성대군의 자손들은 역적으로 몰려 숨어 숨어 살아 자손들이 번창하지 못했다.
다행히 1738년(영조 14) 신원(伸寃)되어 281년만에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나서 영월 창절사, 순흥 성인단, 청안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지난 8월 영주에 문화 답사를 갔다가 우연히 ‘금성대군 신단’을 보고 왔다. 그때 담은 영상을 중심으로 금성대군을 소개하고자 한다.
금성대군 [ 錦城大君 ] : 1426~1457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 순흥에서 유배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관노의 고변으로 사사되었다
이름은 유(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으로 봉해지고, 1437년 자식이 없는 방석(芳碩)의 후사로 입적되었다. 1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혐의로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1)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후 유배된 순흥(順興)에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하여 군사를 모으고 의병을 일으켜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고 하였으나, 거사하기 전 관노의 고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세종의 아들 8명 중 수양대군의 모반에 반발하여 분기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분의 사당 청당사(靑塘祠)는 나의 고향에서 1Km 정도 떨어진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에 있으며, 금성단 (錦城壇)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금성대군이 처형된 곳에 세워진 단이다.
청주 금성대군 제단 (淸州 錦城大君 祭壇)은 충청북도 청주시 미원면 대신리 산 49번지에 있으며 2005년 8월 12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아래 영상에서 ‘금성대군 신단’을 보세요 ^^
어느해던가 부석사 다녀오면서 들려봤던 곳입니다.
금성대군, 그 분의 생애를 다시 읽으며 권력이란 참 무섭구나 하는걸 뻐저리게 느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쟁취를 위해 무슨짓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그래도 금성대군처럼
의를 위해 살다 가시는분들이 있기에 나라가, 역사가 지탱하는 거지요.
금성대군의 후손은 280여년간은 숨죽이며 숨어 살아야 했던
뼈 아픈 고통이 따랐다 합니다.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는 후손이 적어요.
역적으로 몰려 3족이 멸하여 겨우 숨어 살아 남은 사람이 적었나 봅니다.
562년 전 이야기지만 너무 참혹하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