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겪은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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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 겨레

 

아침 신문을 보니  한동안  잊혀졌던   6,25 의  노래가   오늘

강남구청에서  마이크를  통하여  시민들이 들을 수  있게끔

울러 퍼진다고 한다.

다시금  6,25를  상기케하는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내가  겪은  6,25가   떠 오른다.

 

그때  우리가족은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북 영덕에

살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니  전쟁 났다면서  피난 내려 오고

가는 사람들로  길거리가  메어지고  있었다.

나는  전쟁이 뭔지  피난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디로 간다는것만

좋아서  엄마더러 우리도 빨리 가자고  졸랐으니…..

 

가족  네명이  주로  식량을  보따리에 싸서  이고  지고

피난길에 나선것이  6,25의  그날인지  그 이튿날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나는  내 책보따리만  들고서   부모님 따라

나섰다.   우리 가족의 목적지는   부모님의  고향인   경주였다.

 

경주까지  일주일쯤  걸려서  걸어왔다.

어디쯤 오다가 보니  윗통을  벗은  검은 피부의  군인들이

야산에서  삽질을  하고  있는데   흑인을  처음 본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또  어디쯤서는  목이말라   물은  없고

논의 물을  마시고는   얼굴이 퉁퉁  부어서  죽음직전까지

가기도  하고,   잠시나마  부모님  손을  놓쳐서  울면서

찾아 헤매기도  했고….. 직접  전쟁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영덕에서  경주까지  걸어서  오는 길은  험하고도 무서웠다.

 

경주에서도  잠시 피난을  했다.   그때는  불국사까지 갔다가

추석직전에  도로  경주로  돌아 올수는  있었지만.

 

피난생활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먹을거리 고생은  없었다.  서울서 피난 온  사람들은

자루같은걸  들고  늘  이 마을,  저 마을로  동냥을  다니기도

하고  뭔가  물건들을 갖고 와서  양식과  바꿔가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런 고생은  안 했다.

그렇다고 해서  풍족했던건  절대로  아니고,   점심 도시락을

못 싸 간 날이  한 두번도  아니었다.

 

마을  뒷산으로는  늘  총소리가  들렸다.   마을 앞  냇가에는

미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우리는  학교  오가는 길에

미군을  만나면 무서워서  피해 다녔지만  그들이   던져주는

캬라멜이나  껌 때문에  때로는  키브 미  하면서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었다.    언제나   배가 고팠으니까.

 

경주의 계림학교는  교사를  18육군병원에  제공했기 때문에

우리는 늘  돌아다니며  공부를  했었다.  세무서  마당에서도

하고  안압지  정자안에서도  하고   때로는  최부잣집  대청마루에서도

했다.  목에 거는  책상,  목판이라고 해야할까  그런걸   가지고

다녔다.    못 먹어서  말라빠진  몸으로  그런  공부도구를  가지고

몇십리씩을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일도  힘 겨웠지만   우리는

어렸으니까    즐겁기도 했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 구나

나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이 노래는  고뭇줄  놀이 할때  부르던  노래다.

 

그리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던가,   동이 트는 새벽꿈에….

하는  군가도  많이  불렀었지..

 

늘  배가 고팠던  우리는  학교  오가는 길에,  남의 밭에서

밀도  따서  비벼서 먹고  목화다래도  따 먹고   무 까지

뽑아 먹었다.   늘  코를  훌쩍이며  입안에 있던  껌까지

나눠 씹고.

고무신을  아낄려고  어쩌다  시멘트 길을  만나면 벗어서

들고   맨발로 걷기도 하고,   추울때는  짚단을  가지고

다니면서  불을  붙여서 쬐기도  했던  그 시절의  궁핍을

지금의  아이들은  이해도  못할거다.

 

6,25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6,26 를  겪은  세대가  아직도  많이  살아 있다는것을

말해주고  싶다.   북에서  쳐들어 와서  남으로  남으로

피난했는데  무슨  당치도  않는  소리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날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번  강남구청에  박수를 보내며

그리고  이 나라를  지켜주신  참전용사분들께   진심으로

고개숙여  감사를  드린다.

 

15 Comments

  1. 초아

    2016년 6월 24일 at 6:16 오전

    하늘도 슬피우는듯
    비가 귀한 대구에 비가 내립니다.
    *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 겨레..
    *
    그래야 하는데,
    적은 우리 안에 있으니 어쩜 좋아요…ㅠ.ㅠ
    *
    고귀한 희생 진심으로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 데레사

      2016년 6월 24일 at 8:08 오전

      그러게 말입니다.
      이 노래가 한동안 금지되기도 했으니까요.

  2. 김 수남

    2016년 6월 24일 at 6:20 오전

    6,25를 다시 상기 할 수 있는 글 감사합니다.이렇게 산 증인으로 건강히 지내심도 감사합니다.저도 부모님과 큰 오빠한테 많이 들었는데 그 때 초등학교 3학년이셨다니 정말 큰 언니시네요.저희 오빠는 초등학교 1학년 때라 하셨거든요.6,26 노래를 학교서 기념식마다 운동장에 모여 크게 불렀던 날들이 생각납니다.저 역시도 친구들과 함께 무찌르자 오랑캐하면서 고무줄을 펄쩍펄쩍 뛰면서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이했습니다.6월이면 늘 전쟁의 상처 중에도 이렇게 굳건히 다시 일어 선 우라나라와 이겨 낸 분들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데레사 언니 같은 전쟁을 겪으신 분들의 이야기가 함부로 말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바로 인식하는 기회가 되어지길 소망합니다.그 어려운 고비들을 잘 이겨내시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시며 저희들에게 6,25를 상기 시켜 주시는 언니를 축복합니다.늘 더욱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 데레사

      2016년 6월 24일 at 8:13 오전

      그때도 고무줄뛰기에 무찌르자 오랑캐륹
      불렀군요.
      전쟁의 참화는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속에도 잘 나타나 있지요.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북의 만행에 절대
      지지 말아야 합니다.

  3. 김 수남

    2016년 6월 24일 at 6:24 오전

    6,25라고 썼는데요… 지금 보니 위의 숫자가 오타가 났네요.댓글 수정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중요한 날 숫자인데…올리기 전에 재확인을 앞으로 해 보겠습니다.감사합니다.

    • 데레사

      2016년 6월 24일 at 8:31 오전

      댓글 지우는법을 저도 연구해봐야 겠습니다.
      물론 수정도요. ㅎ

    • 데레사

      2016년 6월 24일 at 8:41 오전

      알림판으로 들어가서 댓글 지우기는 가능한데 수정은 아직
      안해봤어요. 아무 될거에요.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요.
      저도 연구 해볼께요.

  4. 無頂

    2016년 6월 24일 at 11:52 오전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북을 볼 때 잠이 안오네요.
    우리도 자주국방으로 대응할 힘을 길러야하는데…
    주변국가의 눈치만 봐야하니 안타깝습니다.

    • 데레사

      2016년 6월 24일 at 8:01 오후

      그러게 말입니다.
      말로는 안보우선이라고 하면서도 정치인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잣대를 들이대니 그게 더 문제지요.

  5. 북한산 78s

    2016년 6월 24일 at 9:36 오후

    저는 6.25사변때에 세상에 태여나지도않은나이지만은 저희 형님과 누님한데 예전 전쟁때에 피난가고 고생햇던 말을 듣고 하엿는데 요즈음새대들은 아마 실감이 안날것 같아요. 같은 마을에도 완장차고 빨갱이 로 설치던사람들이 전쟁후에 어디로갓는지 안보이더라는말도 듣곤 햇습니다.

    • 데레사

      2016년 6월 25일 at 7:42 오전

      맞습니다.
      그때는 낮에는 멀쩡하다가도 밤이되면 완장차고 설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웃끼리도 이상한 일도 많았지요.
      전쟁,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6. 靑睦

    2016년 6월 25일 at 11:16 오전

    지나온 세월이 기적이고 은혜임을 어른들은 압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겠으나 배워서 익혀 두어야 하는 노력까지 태만해서는 안 되겠죠. 요즘 젊은 세대들, 무턱대고 북한을 두둔하고 지지하는 사람들 땜에 소란스런 사회를 보는 즈음에 6.25전쟁을 상기하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회고 기사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 데레사

      2016년 6월 25일 at 4:58 오후

      고맙습니다.
      요즘 북을 동경하고 편드는 무리들을
      보면 속이 많이 상합니다.

  7. 바위

    2016년 6월 27일 at 12:30 오후

    제가 다섯 살 때 6.25가 터졌지요.
    한 달 전 진주 옥봉성당의 성모유치원을 졸업햇습니다.
    부모님 따라 뒤벼리 뒷산의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방공호를 짓고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결국은 합천까지 피난 갔는데 저도 80리를 걸었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셨지요.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희미한 몇 토막의 기억은 납니다.
    그런데도 북측을 편드는 인간들, 참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듭니다.

    • 데레사

      2016년 6월 27일 at 11:41 오후

      아, 그러셨군요.
      그 세대가 살아있는데도 사람들은
      거짓말들을 하고 있어요.
      참 한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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