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에서 단풍과 계곡이 어울린 길이라면 단연 구룡폭포 지나는 길이 으뜸이다. 계곡 흐르는 물에 비친 단풍은 지리산 단풍의 최고로 평가받는 피아골의 삼홍소(三紅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구룡폭포길은 지리산둘레길의 새로운 명소다. 전체적으로 이 코스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 내외를 오르내리는 운봉고원을 지난다. 회덕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남원장으로, 노치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은 운봉장을 보러 다녔던 길이다.
운봉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서부터 구룡폭포을 지나 주천 육모정까지의 걷기 좋은 길이 구룡폭포길이고, 지리산둘레길 구룡폭포순환길이라고 한다.
서어나무숲은 행정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200여 년 전 조성한 인공숲으로, 마을을 지켜주는 비보림이다. 한국의 마을숲들은 대개 풍수적으로 마을의 위치와 방향, 주변의 산세 등을 고려해 인공으로 조림했다. 그만큼 풍수는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마을숲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어나무숲은 지난 2,000년 새 천년을 맞아 산림청과 ‘생명의숲’이 주최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숲 대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임권택 감독이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 아씨와 이 도령이 노닐던 그 숲이기도 하다.
200여년 된 서어나무 70여 그루가 하나같이 훤칠한 키에 미끈한 몸매를 과시하는 근육질이다. 그래서 서어나무를 ‘근육질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서어나무숲 옆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다. 영화에서 춘향이가 타던 그 그네다. 서어나무숲과 그네 주변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감상한다.
숲을 벗어나면 바로 람천 제방길로 이어진다. 제방 주변으로는 작은 해바라기 같은 돼지감자꽃이 여기저기 노랗게 피어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기에 손색없다.
람천 양쪽 제방에 억새와 갈대가 뒤섞여 있다. 옛날 빨치산들이 갈대를 억새로 착각, 억새를 꺾어 입에 물고 물속에 숨기 위해 들어갔으나 억새는 중간에 꽉 차서 전부 숨을 못 쉬고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갈대는 속이 비어 있고 주로 물 옆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반면 억새는 가을 햇빛 아래 역광으로 촬영하면 매우 환상적으로 연출된다.
덕산마을을 살짝 스치면서 가장마을로 접어든다. 둘레길 이정표는 군데군데 세워져 있어 방문객이 길을 찾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가장마을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하는 형국이라 하여 아름다울 ‘佳’자와 분장할 ‘粧’자를 썼다.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터를 뜻하는 농막 ‘庄’자를 쓰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옥녀봉 아래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라고 믿고 있다.
둘레길 옆 무인판매대가 나온다. 지리산둘레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판매대다. 그 위에는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올라서면 운봉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침 주인이 가판대를 정리하러 나왔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물어보더니, “구룡폭포 코스가 훨씬 아름답다”며, 그곳으로 갈 것을 적극 추천한다.
길은 호젓한 산 오솔길로 이어진다. 덕산저수지를 휘감아 돌아간다. 남원 운봉․산내 사람들이 남원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이다. 아직 운치 있게 그대로 남아 있다. 오솔길을 벗어나도 들길, 논길로 이어져도 저수지는 계속 된다. 제법 규모가 커다.
들길 옆으로 코스모스와 산국화 등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다. 벌들도 꽃을 찾아 다니기 바쁘다. 평화로운 산골마을로 들어간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능선에 있는 마을로 유명한 곳이다. 마을 입구에 돌탑 2기가 있다. 마을 앞에 너무 훤히 트여 이를 메우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이 탑이 ‘수구막이’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수구막이도 전형적인 풍수의 한 형태다. 마을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거나 또는 마을의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건물이나 나무, 탑 등을 쌓거나 식재해서 이용한다. 마을숲이나 돌탑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를 알고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노치마을은 원래 ‘갈재’라고 불렸다. 마을에 갈대가 많은 고개라고 해서 갈재라고 부르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노치마을로 변했다. 노치마을을 고리봉에서 수리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낙동강과 섬진강으로 나뉘는 분수령이다. 노치마을 앞으로 흘러가면 섬진강으로 합류하고, 능선 뒤로 가면 낙동강물이 된다.
노치마을은 중간쉼터라도 되는 듯 많은 둘레꾼들이 쉬고 있다. 마을회관 옆에는 화장실과 간식거리도 팔고 있다.
둘레길은 들길이 노치마을과 덕치리 회덕마을을 이어주고 있다. 회덕마을은 원래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 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다. 이는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는 의미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해서 지붕을 만들었다. 억새를 이용해서 만든 샛집이 둘레길을 지나면서 꼭 들어봐야 할 집이다. 전북 민속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덕치리 초가다.
마치 일본식으로 용마루를 높이고 지붕을 경사지게 만들었다. 운봉지역이 고원지대라 눈이 많아서 지은 구조다. 샛집이 있는 자리는 원래 논이었으나 터가 좋다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3채가 샛집으로 보존돼 있다. 매우 고즈넉하면서 아담하다. 샛집을 감싸고 있는 돌담도 정겹다. 집 앞 논밭 너머로 지리산의 봉우리가 줄지어 펼쳐진다.
곧이어 정자나무쉼터가 나온다. 지리산둘레길 순환코스의 시종점인 곳이다. 정자나무쉼터에서 사무락다무락~사랑소나무~구룡치~솔정지~개미정지~내송마을을 거쳐 파출소에서 주천 외평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지리산둘레길이었으나 공단에서 만든 순환코스는 정자나무쉼터에서 구룡폭포~육모정을 지나 외평마을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주천에서 출발, 원점회귀도 가능한 하루 코스다. 3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정자나무쉼터에서 중식을 해결하고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한다.
잠시 논길로 이어진다. 논두렁에는 쑥부쟁이의 연한 보라색꽃과 산국화의 노란색 꽃이 뒤섞여 형형색색의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꽃과 꽃 사이로 벌들이 꿀을 빨아먹기 바쁘다. 수확을 마친 논엔 떨어진 나락을 먹기 위해 메뚜기떼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메뚜기와 벌들이 놀기 바쁜 가을이다.
잠시 도로로 걸어간다.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은 도로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그만 암자 같은 절이 보인다. 굿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원규 시인은 “구룡폭포 인근이 지리산에서 백무동과 함께 음기가 가장 강한 지역”이라고 말한다. 굿소리가 연중 끊일 날이 없다고 한다. 백무동(百巫洞)도 한자 그대로 많은 무속인이 있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백무동은 실제 무속으로 유명하다. 구룡폭포 주변도 그에 버금간다고 한다. 미처 몰랐다.
구룡폭포 입구에 ‘구룡폭포 순환코스 안내도’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있다. 그 옆에는 구룡계곡의 명소 구룡폭포의 설명이 있다.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군데 폭포에서 각각 자리 잡아 노닐다가 다시 승천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구룡계곡으로 서서히 들어간다. 육모정 입구에서 구룡폭포 입구까지 3.4㎞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숲은 더욱 우거져 있다. 여름에 녹음은 가히 볼만 하겠다. 나무들은 전부 활엽수. 햇빛을 완전히 가려준다. 활엽수는 또한 단풍이 들면 정말 장관이겠다. 붉나무는 벌써부터 붉은 잎을 드러낸다. 지리산 단풍은 11월 돼야 제대로 볼 수 있다. 12월에는 잎이 떨어졌거나 간혹 붉은 잎을 몇 개 남긴 나무들을 볼 수 있는 정도다.
구룡폭포 전망대에 올라섰다. 한 마디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지리산에 이런 계곡이 있었나!’ 할 정도로 깊은 계곡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백두산에서 보던 그런 계곡 같다. 지리산 서북능선 아래 자락이 이렇게 깊은 줄 새삼 몰랐다. 장쾌한 협곡의 지리산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지리산의 새로운 맛이고 멋이다.
나무계단으로 내려간다. 구룡폭포가 물을 내리쏟고 있다. 폭포 위의 나무들은 붉으락푸르락 한 모양으로 곧 붉게 물들 자세다. 피아골보다 훨씬 더 깊은 계곡에, 그곳에 흐르는 물은 정말 단풍도, 물도, 사람도 붉게 물들게 하는 삼홍소가 될 것 같다.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는 끊임없이 들린다. 마치 세속의 소리를 씻고 가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다. 이 길이 이미 소문이 날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는가 보다. 울창한 숲과 쉴 새 없이 흐르는 계곡물소리에 어느 덧 세속을 떠난 신선이 된 느낌이다.
구룡계곡의 9곡 중 6곡인 지주대가 나온다. 한자로 ‘砥柱臺’. 말 그대로 풀면 ‘숫돌 기둥 받침대 정도 되겠다. 6곡 둘레의 기암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듯 구름다리 앞에 자그마한 봉우리가 솟아 있어 지주대라 불린다. 지주대는 두 개의 계곡에서 흐른 물이 지주대 앞에서 한 줄기로 합류해서 흐르는 모양새다. 지리산에서 뻗은 한 능선이 물의 합류지점에서 멈춰 강한 기운이 뭉친 형국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강한 바위 기운이 느껴진다. 지주대는 마치 주상절리 같다. 주상절리 암벽에 ‘砥柱臺’라고 석각돼 있다.
계곡은 계속 된다. 이어 유선대(遊仙臺)다. 계곡에 있는 반반한 바위에 선이 많이 그어져 선인들이 바둑을 두며 즐겼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곳이다. 주변의 절벽은 병풍을 쳐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은선병(隱仙屛)이라고 한다. 그 유선대에 남녀 한 쌍이 간이 의자와 간이 테이블을 놓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다. 자연 속에 푹 빠진 분위기다.
구룡폭포, 아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룡계곡의 다양한 모습에 감탄의 연속이다. 어떤 바위는 반반한 모습이 마치 워터슬라이드를 즐기기에도 전혀 무리 없을 정도다. 가을엔 계곡과 어울린 단풍, 여름엔 탁족을 떠오르게 한다. 계곡의 깊이는 설악산 천불동계곡을 연상케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인간과 같이 놀 수 있는 분위기다. 이게 지리산만의 장점이다.
이제 서서히 춘향의 흔적이 조금씩 보인다. 계곡을 지나는 다리 이름이 사랑의 다리다. 춘향을 생각해서 만들었다. 구시소도 나온다. 떨어지는 물살에 패인 바위의 모양이 마치 소나 말의 먹이통인 ‘구유’처럼 생겼다고 해서, 남원 사투리인 구시를 써서 ‘구시소’로 부르게 됐다는 설명이 있다.
구룡계곡의 끝 지점에 이르자 도로로 접속한다. ‘한국의 名水, 구룡계곡’이란 바위가 입구에 세워져 있다. 그 아래, 남원 시내로 가는 도로로 200m쯤 내려가면 육모정이 나온다.
육모정(六茅亭). 여섯 개의 띠를 이은 정자란 뜻이다. 사실 구룡계곡은 남원에서 내로라하는 시인묵객이나 남원부사 등 관리들이 음풍농월하는 놀이터였다. 남원 시내에서 불과 30리 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어 언제든 자연과 더불어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곳이다. 이들이 친분을 나누고 도의지심과 상부상조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원동계다. 그게 1572년 용호상(지금의 구룡계곡)에서 이뤄졌다.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고, 학문도 논하며 지역주민들을 선도하는 그런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육모정이다. 육모정 바로 옆에는 용호서원이 있고, 그 옆에 춘향의 묘가 있다. 남원 시내에 광한루가 있다면 광한루와 지리산을 잇는 연결고리가 육모정이다. 광한루가 시내에 자연을 옮겨놓은 누각이라면, 육모정은 자연 속에 있는 자연 그 자체의 정자인 것이다.
지리산국립공원 북부사무소 지소를 거쳐 외평마을에 오면 그곳이 둘레길 시종점이다. 이곳 주천에서 지리산둘레길과 순환코스를 돌아 원점회귀 할 수 있다. 깊어가는 가을, 계곡에 물든 단풍과 단풍과 어울린 마음까지 보려면 지리산둘레길 주천~구룡계곡~운봉 행정마을 서어나무숲까지 가는 코스를 적극 추천한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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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2015 at 11:37 오전
구룡계곡 바로 옆을 따라 올라가는 정령치길 타고 올라가 고기리 삼거리에서 운봉으로 빠지거나 정령치로 가는 길도 환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