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없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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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달력 없이는 살 수 없다.
새 달력은 매년 말쯤에 나타났다가 년 초가 되면 가질 사람은 가 가져져가고 그다음엔 사라진다. 그때쯤 달력을 얻어다가 벽에 걸어놓으면 일 년 내내 눈을 맞추며 산다.
나는 벽에 거는 달력을 선호한다. 그럴듯한 사진 밑에 날자가 적혀있는 달력 말이다.
일요일은 빨간색 숫자로 적혀 있다. 노는 날이라는 뜻이다. 명절과 국경일도 역시 빨간 색으로 되어 있다. 매달 달력을 넘기면서 이번 달에는 빨간 날자가 몇이나 되나 살펴보곤 한다.
노는 날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가. 돈만큼이나 좋다.
나는 달력을 조작해서 세 달을 한눈에 볼 수 있게끔 나열해 놓고 본다. 미리미리 계획을 짜 나가기 위해서다. 약속과 계획을 날자 밑에 적어놓고 보면 매일 달력을 볼 때 마다 기억을 되살려 주기도 한다.
옛날 시골집에 가보면 한 장에 일 년이 다 들어 있는 달력을 벽에 붙여놓고 있었다. 그런 달력에는 절기가 적혀 있어서 농사일에 참고가 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월력인 것이다. 달력 밑에는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 이름이 적혀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는 달력처럼 고향을 타는 사물도 없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달력은 이미 달력이 아니다.
경기도 파주 출신 국회의원 이름이 적혀 있는 달력을 전라도 남원에다가 붙여 놓는 다면 이는 얼마나 넌센스인가. 한국달력을 미국에서는 쓸 수 없다. 그림이나 볼라치면 모를까 달력으로서의 기능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국가 간에 명절과 국경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은 한국명절과 미국명절, 한국국경일과 미국국경일이 다 들어있는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양국의 휴일이 다 들어 있는 달력은 교포사회에서나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교포 식품점이나 각 교회들이 앞다퉈가면서 달력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찌 된 일인지 달력도 귀해졌다. 수년전부터 경기가 없어서 달력도 못 만든다며 꼬리를 내리더니 경기가 살아난 지금도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제는 달력이 아예 귀한 손님이 되고 말았다.
사실은 핑계를 경기에다가 갔다댈 뿐이지 실은 스마트폰의 등장이 진범이다.
인터넷이 종이신문을 잡아먹었듯이 스마트폰이 종이 달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종이달력에 익숙해온 세대들은 달력이 있어야 살아가는 맛이 난다.
우리 집에는 부엌 벽에 하나 걸어놓고, 내 방 책상위에 걸어놓고, 안방에 걸어놓고, 직장 사무실 벽에 걸어놓고, 나 혼자만 아는 훼밀리룸 벽난로 옆 벽에 걸어놓고 있다.
빈 벽에 달력이 걸려 있어야 사는 집 같고, 달력을 뜯어내야 살아가는 맛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이 며칠이며 무슨 요일인지 확인하고 하루의 스케쥴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국에는 아직도 달력이 흔하다.
매년 년 말은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어디에선가 달력이 생기기 마련이고 딱히 달력에 대해서 고민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금년에는 달랐다.
년 말은 물론이고 음력설까지 지내고 한국에 왔더니 새해 달력이 없는 것이다.
때를 놓쳤으니 어디 가서 달력을 구하나 하는 문제가 생겼다.
달력을 배포하던 기관을 기웃거려 봤지만 아직까지 달력이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에게 달력 남은 것 있느냐고 묻기도 그렇고, 하치않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달력 없이 며칠 지내다 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물론 컴퓨터에 며칠인지 나와 있고 머리로 계산하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달력이 있어야 앞뒤 날짜를 따져보고 다음 주까지 훑어 봐야 통방이 서는 일을 그냥 대충 잡아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침 오늘아침에는 화정동 삼성 AS센터에 갔었다.
3층 넓은 AS공간에 스마트폰 고장 수리를 해 주는 카운터가 24개나 된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은 고장을 잘 내키는 모양이다. 노트북 수리 카운터는 8곳이 있다.
한 30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디 달력 버리는 거 없나 하고 두리번거려 봤지만 버리는 달력은 없었다. 마침 나를 상담해 주는 아가씨가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어도 친절하고 상냥하기에 혹시 하는 마음에 “남아도는, 아니면 쓰다버리는 달력 있으면 하나 구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아가씨 상냥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냉정하게 한마디로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은 모두 스마트폰으로 본다고 한다. 왜 들 떨어진 소리를 하느냐는 식이다.
할 수 없이 오는 길에 내가 다니는 치과사무실에 들렸다.
리셉숀 아가씨 뒤 책상위에 작은 달력이 놓여있다. 내일 오후 3시 반 예약을 하면서 저 달력 날 달라고 했다. 아가씨는 안에 남은 게 있다면서 하나 내다 준다.
내 취향은 벽에 거는 달력이지만 어쩌랴 이 마당에 책상위에 놓는 달력일망정 대 만족이다.
작년, 재작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앉은뱅이 달력이 이렇게 귀하게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달력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아쉬운 생활인지 격어보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마치 아내가 한 달간 집 비우고 나갔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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