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철을 탔다가 깜짝 놀랐다. 내가 무당집에 들어 온건 아닌가? 차 안이 온통 빨갛다. 너무 빨개서 정신이 혼란스럽다.
자리에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코카콜라 선전이다. 전철 안을 온통 코카콜라 빨간색으로 도배를 해 놓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천장과 유리만 빼놓고 전체가 빨갛다. 특히 바닥 전체를 빨갛게 해 놓았으니 그리고 의자 옆구리 공간마다 빨간색 투성이다.
전통적으로 광고가 붙어 있어야할 자리에는 코카콜라 광고뿐이고 아무튼 코카콜라 독점이다.
누가 이런 광고를 제안했으며 누가 받아들이라고 했는지 그 사람 참 용감한 사람이다. 시민들의 투정을 어찌 다 받아내려고 용단을 내렸는지 기가 막힌다.
무엇이든지 과하면 모라르니만 못하다 하지 않았던가. 이건 과함을 넘어 넘쳐난다고나 할까.
다른 칸도 이렇게 했나 드려다 봤더니 아니다, 이 칸만 그렇다.
때로는 사람을 놀라키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낮에 전철을 타면 노인들이 많다.
노인들 지정석이 넘쳐나서 일반석도 차지하고 있다.
나는 전철 좌석에 말없이 앉아있는 노인들을 볼 때 마다 초라하게 보인다. 가련하게도 보인다. 무엇이 그들을 초라하고 가련하게 보이게끔 만드는가?
할 일 없는 노인들이 공짜 전철을 타고 하염없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철 속에서 늙어가고 있는 모습이 가련해 보이는 것이다.
어제 친구를 만나 점심을 같이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약속장소에 너무 일찍 당도했단다.
마침 근처에 석촌호수가 있어서 그곳에 가서 운동삼아 한 바퀴 걷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젊었을 때 같으면 만나자고 해도 시간 없다면서 만나주지도 않던 친구다.
내가 수원까지 가야만 겨우 얼굴 볼 수 있었던 친구다.
이야기 끝에 내 방에 금년 달력이 없다고 했다. 이 친구 곧바로 한 건 생겼구나 하는 식으로 자기에게 여유 달력이 있다면서 갖다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다음 날 아침에 곧바로 전화가 왔다. 지금 너한테 가는 중이라고 한다.
이 친구 늙더니 성질도 급해졌다.
자그마치 수원에서 전철을 타고 일산까지 오려면 두 시간도 넘게 걸릴 것이다.
그 먼 길을 당장에 달려오겠다니, 참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량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래도 전철타고 시간 소비해야 할 판인데 달력 한 장 갖다 주겠다는 목적이 생겼으니 그런대로 마음 한편에 초라하다는 심리는 가셔주지 않았겠는가 여겨진다.
참으로 서글픈 노인인생이다.
불과 우리의 웃세대까지만 해도 아들 선호 세대였다. 아들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아들, 아들 했었다. 노후에 아들과 같이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 집에서의 시어머니는 큰소리 땅땅 치면서 살았다.
아들이 없는 사람은 딸네 집에서 얹혀살아야 했다. 얹혀사는 신세는 초라한 신세로 보았다.
본인은 초라하지 않다고 해도 통념상 딸네 집 얹혀살면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다.
처가살이를 해도 초라하게 보였다. 오죽하면 겉보리 서말이면 운운했겠는가.
오늘날 노인들이 전철을 타고 다니는 모습들이 마치 딸네 집에서 얹혀사는 신세처럼 보인다.
전철이 아들 집이 못 되고 딸네 집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정정당당하게 전철승차 값을 치루고 탔다면 이렇게까지 초라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공짜여서 좋기는 하지만 공짜에는 댓 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자존심 상하는 댓 가를 치러야 한다.
전철에 앉아있는 노인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잃었다. 아니 웃음에 인색하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긴 질곡을 헤쳐 오면서 얻은 고생의 흔적이 얼굴에 훈장처럼
남아 있다.
활기를 잃은 얼굴, 웃음은 다 도둑맞고 말았나보다.
입고 있는 옷마저 칙칙하게 죽어버린 검은색 일색이어서 더욱 초라하고 없어 보인다.
우중충해 보인다,
초라하고 우중충해 보이면 없음 여김 당하기 마련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정말 가난했음으로 가난이 뚝뚝 떨어지게 차려입고 다녀야만 했다. 반에서는 남 여학생 짝으로 앉았다. 누군가 방구남새를 풍겼다. 아이들은 모두 나를 처다 본다. 나는 아닌데, 정말 아닌데, 모두들 나를 주목하고 있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무언중에 범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누추하게 입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범인으로 지목되고 만 것이다. 뒤늦게 내가 아니라고 말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누추하고 초라해 보이면 당할 수박에 없다.
어차피 노인들이 귀해서 대우받는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스스로 대우받는 인생으로 변신해야 하지 않겠나.
선진국 노인들이 자기본분을 지키는 삶을 유지하는 것은 자아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전철 안에서 눈감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처럼 처량한 신세는 없을 것이다.
이왕에 전철 안에서 늙어가는 인생 이제 와서 어쩔 수는 없는 일이라면 최소한도 누추하게 입고 다녀서는 안 될 것이다.
색깔이라도 밝고 환한 색으로 골라 입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구두도 광이나 게 닦아 신고.
인간의 눈이란 요상한 것이어서 옷만 바꿔 입어도 사람이 격상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처량하게 보이지는 않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처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께임을 한다든지 아니면 신문이라도 읽는다든지, 하다못해 잡지라도 들춰보면서 앉아있었으면 할 일없는 노인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눈이 나빠 책을 읽을 수 없다면 귀에다가 이어폰을 끼고 음악이라도 듣고 있다면 할 일 없는 노인으로 취급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전철 안에서 늙어가는 인생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바쁘게 지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