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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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많은 량의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요즈음은 일기예보도 잘 맞춘다. 정말 비가 많이 온다. 천둥번개를 치면서 비가 내린다.
우중충한 오후 어둑어둑해 질 무렵 배가 출출하다.
이럴 때는 밀부치게를 부처 먹으면 딱 좋겠건만 할 줄도 모르고 재료도 없다.
수제비라도 끓여 먹었으면 좋으련만 밀가루가 없다.
혼자 밥을 지어 먹기도 귀찮다. TV나 보면서 딩굴고 있는 것도 한 두 시간이지 이젠 어딘가 다녀왔으면 좋겠다.
값싼 별치국수 생각이 난다. 별치국물에 갓 삶은 국수가 얼마나 구수한가.
옷을 주워 입고 전철을 타고 낙원동 지하상가에 가서 별치국수나 먹고 와야 하겠다 싶어서 준비하고 나섰다.
웬 걸, 비오는 폼이 장난이 아니다. 진짜로 쏘다진다. 하늘이 깜깜하고 천둥번개에 번쩍 스파크를 일으키는데 이럴 때는 멀리 가는 게 아닐 것이다.
가까운 곳에 국수집이 있나 걸어보기로 했다. 지척에 털보내 국수집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우동 맛을 내면서 잔치국수라고 하니 영 마음에 안 든다.
우동인지 잔치국수인지 불분명한 맛을 팔고 있다.
한참 걸어 봤으나 모두들 고기 위주로 하는 음식점만 있지 싸구려 국수는 없다.
겨우 코너에 작은 집을 찾았는데 뭐 한 두 가지만 하는 게 아니다.
뭐든지 다 만든다는 식이다.
좀 허름하기는 해도 별치국수는 이 집뿐이니 들어가 보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시간인데 손님은 아무도 없다. 혹시 영업 하지 않나 해서 물어 봤더니 하기는 한단다. 아무튼 별치국수를 주문했다.
주문하면서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저녁으로 싸구려별치국수를 먹는단 말인가.
저 늙은이 궁상 되게 떠 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격지심이겠지 하면서도 나처럼 먹는 사람도 있지 하고 속으로 위안을 해본다.

아저씨는 군말 안 하고 즉석에서 국수를 삶는다.
식당 안을 살펴보니 선술집 같은 분위기이다.
막걸리 주전자가 여러 개 걸려 있고, 생 무가 자루로 세워져 있다. 고추장도 큰 거 네 박스가 쌓여 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노동자들이 모일 때는 꽤 오는 모양이다.
국수는 뜨거웠다.
뜨거운 것도 일종의 맛이다.
멸치 비린내가 나기는 나더만, 순수한 별치국물 같지는 않다.
아무튼 별치 냄새와 뜨거운 맛에 먹기는 잘 먹었다.
그러나 가격이 맘에 안 들었다. 5천원이다. 3천5백 원이면 딱 맞겠더구먼, 허기야 이 장소에서 그 가격으로는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이해한다.
국수 한 그릇이 저녁이 될 수는 없다. 오다가 파리스 바케트 빵집에 들려 쇼빵 중에 가장 싼 3500원짜리 한 덩어리 사들고 가려는데 다 팔리고 없다. 4500원 짜리 뻐더 섞인 쇼빵만 남아 있다.
가격이 싸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맨숭맨숭한 쇼빵 맛이 더 좋아서 선호하는 것이다.
결국 내 입 맛은 낡은 싸구려가 돼서 오래된 자동차 부품 구하기 어려운 것처럼 입맛에 맞는 먹거리 찾아내기도 힘든 일이다.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소리가 나온 것 같다.
비 오는 날이면 늙었다는 징조가 더욱 기승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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