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근본이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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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위를 무릅쓰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더워빠져 죽겠는데 무슨 목욕은 목욕인가 만은 머리를 깎으려면 이발소가
목욕탕 안에 있으니 나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다.
땀을 흘리면서 목욕탕 에 갔더니 문이 닫혀있다. 수리중이란다.
작은 사인을 읽어보니 뭐 11월에나 가야 문을 연다나?
무슨 놈의 수리가 이렇게 긴가.
아마도 다 뜯어내고 뭐 딴 수작을 부릴 모양이다.
보나마나 가격을 높이 올려 받으려 들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서 일하던 이발사는 뭘 먹고 살라고 몇 달씩 문을 닫겠다는 건지
내가다 걱정스럽다.

그러나 저러나 큰일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다녀 봤지만 이발소는 없다.
이 지역 인구분포도 남자가 반 일 텐데 어찌된 게 미장원은 넘쳐나는데
이발소는 없다.
남자들은 어디에 가서 머리를 깎는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기껏 떠올린 게 낙원동 실버극장 근처에 가면 싸구려 이발소들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오늘은 작정을 하고 종로로 나갔다.
3가 지하철역에는 늘 노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별로 없다.
나온 김에 고등어구이나 먹으려고 가다보니 이발소가 눈에 띈다.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필요하니까 눈에 띈다. 여기만이 아니라 저기에도 있다.
이발 3천 5백 원, 염색 4천 원이라고 큰 글씨로 써 붙였다.
싸도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싸면 엉터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목욕탕에서 이발, 염색하고 나면 2만원 지불했다.
가격만 크게 써 붙여놓은걸 보면서 옛날 미아리 고개 넘어 미도극장
생각이 난다.
2류도 못되는 3류 극장에 가면 관객들도 3류가 돼서 상영 중에 껌 씹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애가 울지를 않나, 공기도 탁하고 냄새도 났다.
이발소 간판이 께름칙했지만, 그래도 들어가 보기로 했다.
지하로 들어가니 선풍기가 돌고 있어서 덥지는 않았다.
의자가 6개에 이발사가 3분 있었다.
나 말고도 손님이 하난가 둘이 있었으나 내가 들어가자 마지 앉으란다.
백세나이 노래가 메들리로 흘러나온다.

모자를 벗어 탁자위에 놓았다.
이발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니 옛날 1960년대 생각이 난다.
아니 그보다 더 전이 1950년대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옆으로는 날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녔고 무슨 냄새가 나는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냄새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약간 시궁창 냄새 같기도 한데 꼭 그런 건 아닌 것도 같고
잘 모르겠다. 한참 지난다음에야 생각이 났다. 곰팡이 냄새다.
앞에 보이는 거울 밑에 작은 사인이 붙어 있다.
잃어버리는 물건을 책임 안지겠단다. 특히 안경 조심하라고 쓰여 있다.
그 다음에 손님을 위해 좋은 염색약을 쓰기 때문에 5백 원 더 받겠다고 쓰여
있다. 아무튼 머리 깎고, 염색하고 10분을 기다렸다가 머리 감으란다.
소파로 밀려나 앉아 있는데 그 사이에 곧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머리만 깎고 가는 사람, 나처럼 염색하려고 기다리는 사람
그러나 아무도 말이 없다.

손님들은 공짜 커피를 따라 마신다.
이발사들이 나처럼 늙었다.
옛날 이발소에 옛날 가격을 받는 까닭은 옛날 사람들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은 옛날이 아니다. 이발사도 현실을 살고 있다. 현실은 모든
것이 비싸다.
어떻게 그 큰 갭을 맞추고 있을까?
1960년대 이발소에 들어가면 이발하고 서비스 받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발하고, 면도해 주고, 머리 깜아 주고, 화장해 주고, 귀 후벼주고, 어떤 때는
안마도 해주고, 머리 고대까지 해 주었다.
손님 한 사람을 붙들고 1시간도 넘게 모셨다.
그러나 오늘 종로3가에서 일하는 이발사는 한 시간에 3-4명 머리를 깎는다.
옛날에 비해서 작업량이 많아졌다. 결국 작업량으로 갭을 메우고 있었다.
그 많은 일을 감당하고 집에 돌아가면 어깻죽지가 아파서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 걱정이다.
현대는 사람 살기에 편해졌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 잡는 세상이다.

10분후에 머리를 감으라고 했는데 10분이 지났는데 아무도 말이 없으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내가 혼자서 감아야 하는 건지, 누가 감아 주는 건지 알 수 없다.
할 수 없어서 옆에서 나처럼 기다리고 있는 손님에게 물어 봤다.
이발사가 감아준다고 기다리란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거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20분이 지났고 또 흘러간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염색약을 바르고 오래 있는 것은 좋을 게 없다고
하던데 이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머리 감아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발하느라고 바쁘다.
이까짓 머리 감는 게 뭐 대수라고 내가하면 그만이지, 나는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샤워 줄을 고정시켜 놔서 나 혼자서는 머리를 못 감게 해 놨다.
물소리를 듣고 온 이발사에게 본의 아닌 거짓말을 해야 했다.
바빠서 가야 한다고.
다 합쳐서 이발 값으로 9천원 줬다.
내가 단골로 머리 깎던 목욕탕 이발소에 비하면 반가격도 안 된다.
나는 오면서 생각해 봤다.
타임 미신을 타고 반세기를 뒤로 갔다가 온 기분이다.
그리고 늙은 이발사의 손님은 늙은이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손님이 되겠는가?
많이 후지지만 싫지는 않았다. 나의 근본이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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