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태극기는 분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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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청광장에 모였던 것은 아니다.
촛불의 정당성을 바라보고 이해도 됐고, 공감도 했고, 칭찬도 했다.
그러나 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마치 축제의 장으로 변해갔고, 거기에다가 정치세력과
미디어가 합세하면서 굿판을 벌리듯 인민재판 형국으로 몰고 갔다.

정치세력이 정치로 해법을 찾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걸고 넘어뜨리는가에만 몰두하면서
근거도 없고 말도 안 되는 공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반칙으로 득점을 취하려 들면 관중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설혹 게임에
승리하더라도 반쪽 승리에 그치고 만다.
문제인 후보가 정권을 잡기 위해 앞에 나서 있다는 것이 고깝게 보였고 추상같은
추미애 의원과 원내총무의 발언이 오히려 악의에 찬 소리로 들려오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촛불시위와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가짜 조형물들은
참으로 유치하고 치졸한 인민재판을 방불케 했고 패러디가 지나쳐 나체 사진이
나도는 게 중국 문화혁명을 연상시켰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은 점점 깊어만 갔다.
뜻이 옳아도 방법이 치졸하면 정당하게 보이지 않기 마련이고 국민의 온전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
태극기가 뭉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한쪽으로 기울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태극기의 물결은 최소한 촛불처럼 그렇게 유치하게 굴지는 않았다.
시위가 마치 축제인양 노래판을 벌리지도 않았고,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지도 않았고, 치졸한 조형물을 만들지도 않았다.

탄핵판결은 옳았다.
조목조목 읽어 내리는 항목마다 구구절절 옳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짚어가면서 마지막 선언은 참으로 지당하게 들렸다.
지당한 말씀이라고 수긍하면서도 억울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왜일까?
억울하고 분통하고 비통함을 느꼈다. 치욕스럽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렸다.
나는 박근혜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비통함을 느끼는데 박근혜 본인은 오죽했겠는가?
내가 억울한 것은 박근혜가 무죄가 돼서 억울한 것이 아니다.
지난 석 달 동안 겪었던 치욕과 수모를 편파적으로 여과 없이 보도해 온 미디어와
극단적인 살인적 발언들에 치가 떨려서 분통이 터졌다.

1919년 3월 1일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해서 독립이 이뤄지리라고 믿지 않았던 것처럼
시청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든다고 해서 탄핵이 무효가 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이 될 것이다.
삼일절이 역사 속에 영원히 남아있듯이 탄핵과정도 그러하리라.

그사이 며칠이 지났다고, 역시 젊은이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느낌이 온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나가야 한다. 후진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파헤칠 것은 파헤치고 벌할 것은 벌해야 한다.
촛불을 등에 업은 정치세력이 청문회를 통해서 억지를 부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국론 분열은 집권하겠다는 정치세력이 벌려놓고 지금도 봉합보다는 더 깊은 분열을
부추기는 후보들에게 분통을 느낀다.

대한민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때문에 잠정적 평화 속에서 발전해 왔다.
조약에 보면 <당사국 중 일국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의 무력공격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고 인정될 경우 언제든지 양국은 서로 협의한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비(配備)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대한민국은 이를 허락한다.>로 되어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협받고 있다.
당연히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은 한국 영토 내에 사드 배치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정부는 이를 허가할 의무가 있다.
다음 대통령으로 유력한 문 후보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요구에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언뜻 듣기에 그럴듯하게 들린다. 젊은이들이 들어보면 주체의식 속에서 주권을
찾겠다는 소리로 왜곡해서 들리기 쉽다.
이런 말장난이 지난 석 달 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에 태극기를 들었고
또 놓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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