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호박꽃이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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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호박을 심어놓고 따 먹었지만 올해처럼 실망해 본 적은 없었다.
호박 넝쿨에 숫꽃만 무성하다.

아내가 한국 호박은 속이 노랗고 딱딱해서 맛있다며 한국 호박을 심어달라고 했다.
한국에서 씨를 사다가 심었다. 토실토실한 게 제법 딱딱하고 맛도 괜찮았다.
수확도 좋아서 많이 따 먹었다.
금년에도 같은 씨를 심으려고 한국에서 씨를 사 오다가 그만 샌프란시스코 공항
검색대에서 엑스레이 검색에 걸려 빼앗기고 말았다.
처음이기에 벌금은 물리지 않는다고 주의까지 받았다.

아내가 한국 식품점에서 더 좋은 씨라면서 가져왔다.
호박이 길쭉하고 단단하단다. 전 부쳐 먹기에도 좋다고 했다.
심어놓고 열심히 보살펴 줬다.

얼마 전에 한국 시골에서 평생 농사만 짓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요새는 옛날 같지 않아서 가지도 그렇고 고춧잎이며 줄기가 어른 키 반만큼씩 자라나
무성하기가 웬만한 나무 같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개량종이 돼서 그래, 많이 달리게 하다 보니 줄기를 나무처럼 크게 길러야 한다니까”
개량종은 다 좋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올해 내가 심은 호박도 개량종이 분명했다.
첫 번째 호박꽃이 피던 날 암꽃이 다섯 개에 숫꽃이 하나 피었다.
요새는 벌도 귀해서 내가 직접 접목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귀한 수꽃을 꺾어서 일일이 접목해줬다.
그다음 날은 암꽃이 열 개나 피었으나 숫꽃은 하나도 없다.
이 일을 어쩌나, 남의 집에 가서 숫꽃을 빌려올 수도 없고 가슴 아프지만,
오늘 암꽃들은 처녀로 늙어 죽을 팔자다.

작년에도 그랬다.
숫꽃이 피는 날은 숫꽃만 피고 암꽃이 피는 날은 암꽃만 펴 싸서 짝을 지어줄 수 없는
고충을 겪었다. 궁리 끝에 수꽃을 따다가 냉장고에 얼려 놓았다가 다음 날 암꽃만 피면
꺼내서 녹인 다음 접목을 시켜주었던 일도 있다.

금년에는 딱 두 번 여러 개의 암꽃이 피고 난 다음부터 오늘로 3주째가 지나가건만
암꽃은 구경도 못 하겠다. 매일 수꽃만 펴 댄다.
아침 먹기 전에 아내가 나가서 보고 오늘도 암꽃이 없네 하는 지가 벌써 몇 주째냐?
수꽃만 한꺼번에 십여 개씩 피어대면서 지들도 혹시 암꽃 없나 하고 두리번대는 꼴이
보기에 망측하고 민망하다.
개량종이면 다 좋은 거로 알았는데 어떻게 개량했기에 이 모양, 이 꼴인지
일 년 농사 다 망치게 생겼다.

무엇이든 자연을 배반하면 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걸어 다니라고 두 다리를 줬는데 차만 타고 다니는 것도, 설탕은 조금만 먹으라고
귀한 것을 다량생산으로 넘쳐나게 한 것도, 고기가 맛있다고 고기만 먹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매사 맛있는 것은 귀하고 존귀해서 아끼고 조금만 써야 하는데 사랑질이 재미있다고
마구 써대면 결국엔 추잡하게 늙고 만다.
욕심 같아서는 암꽃만 피어대면 호박이 많이 달릴 것 같아도 숫꽃없는 세상은 헛 거나
다름없다.

자연만이 아름답건만 씨앗 시장에 가도 어찌된 세상이 개량종만 있고 자연산은 없다.
마치 서울에 가면 조금이나마 성형 안 한 여자가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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