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비 맞으며 책 읽는 여인
캐나다 토론토에서 사는 아들이 방문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오래된 책들을 보면서 물어본다.
“아버지 저 책들 갖다 버려 줄까요?”
보지도 않는 쓸모없는 오래된 책들은 이제 버려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아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깝다.
헌책들이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게 늙은이네 집이란 티를 내는 주범이다.
“그냥 놔둬라,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일전에 캐나다에서 사는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다.
친구는 제목만 봐도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추억 속에서 사는 인생의 전형적인 일면이다.
그러나 아들이 보기에는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다.
쓰레기가 맞다. 친구 죽으면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다.
나는 친구처럼 추억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건물 한쪽에 독서 방을 차려놓고 도서가 1만 여권 꽂혀있었다.
전 한인회장은 도서관학과 출신이라 책을 모아 독서 방을 꾸려놓고 죽었다.
다음 한인회장은 2년여를 지켜보다가 몽땅 트럭에 실어 쓰레기장에 갖다 버렸다.
독서 방이라는 게 지난 2년 동안 들르는 사람이 없었단다.
자리만 차지했지 쓸모없는 거라고 했다.
오클랜드 차이나타운에 가면 ‘아시안 도서관‘이 있다.
오클랜드 시립 도서관 분점을 차려놓은 곳이다.
거의 다 중국인들이 드나드는 도서관이다.
그곳에 한국 섹션과 일본 섹션도 있다.
한국 섹션이라고 해 봐야 도서 진열대 두 줄이 전부다.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한 번 걸어가면 그게 다다.
하지만 한국인 직원이 두 명이나 있다.
일 년에 도서구매 예산이 2000 달러(2백2십 만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번에 들렸다가 내가 보던 책일망정 기증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나도 안다. 책이라고 아무 책이나 다 받아줄 리 없다.
먼저 리스트를 보내드릴 테니 그중에서 고르라고 했다.
이제 리스트를 어떻게 짤까 고민 중이다.
읽기에 딱딱한 책은 골라서 일산 알라딘에 갖다 팔고,
문학 서적 위주로 도서관에 기증할 생각이다.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 처분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몽땅 쓰레기장으로 실려 가고 말 것이다.
죽기 전에 스스로 정리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인생이다.
존 매케인 상원 의원은 스스로 자기 묘비명도 써놓고 죽지 않았더냐.
“He served his country(조국에 충성했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첫 번째로 시집 리스트를 만들고, 두 번째로 소설집 리스트를 만들 생각이다.
지난 몇 년 사이에 구입한 시집 중에서 45권을 골랐다. 책 상태는 새 책이나 다름없다.
나도 책장을 비운다는 게 아깝지만 필요하면 빌려다 보면 된다.
시집 리스트를 email로 오클랜드 시립 도서관에 보냈다.
리스트를 읽어보고 뭐라고 할지 회신을 기다린다.
며칠 만에 도서관에서 회신이 왔다.
<시간 되실 때 도서관에 들르셔서 목록에 있는 책들을 남겨주시면 감사히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이메일에서 잠시 언급했었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기증받은 책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기관에 재기증이 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기증해 주신 책들이 오클랜드 도서관에서 사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드리고
기증해 주실 때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멋진 시집 컬렉션 목록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풍초
2018년 10월 31일 at 11:56 오후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서울에서는, 구립 도서관에서조차 웬만한(?) 책 아니면 기증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전집류라면 받아주는데 있습니다. 잡다한 소설류는 헌책방에나 갖다주면 좋아할까… 낙서가 되어있으면 아무도 안받아주고요… 여기저기 문의하는데 드는 시간 낭비, 교통비 감안하면, 그냥 버리는 게 낫다… 단지 버릴때 노끈으로 묶어서 쓰레기장 한켠에 놓아두면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집어갑니다. 저도 가끔 그렇게 집어왔구요.. 그래서 이사갈 때는 그렇게 책장 정리를 합니다. 제가 소중히 보관하던 30-40년 된 책들을 제 자식들이 훗날 볼 것 같지 않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