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저녁 손주 녀석이 헐레벌떡 내 방으로 들어와 숨을 거푸 쉬면서 알려줄 게 있단다.
“그래 뭐냐, 천천히 말해 보거라.”
내일 학교에서 특기 자랑이 있는데 자기가 첫 번째로 무대에 올라갈 거란다.
무대에서 무얼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마술을 보여줄 거란다.
날더러 와서 봐달라는 부탁인 모양인데 어찌 그냥 보낼 수 있겠는가.
가 보기로 했다.
방학을 앞두고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장끼 자랑(Talent Events Show)‘이다.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전교생 250여 명이 모였다.
어린 시절을 한 학교에서 지내다 보면 서로들 아는 건 물론이려니와
더러는 부모들끼리도 안다. 동네 아이들이니까.
2학년인 손주 녀석이 제일 먼저 가설무대에 등장했다.
카드를 가지고 이리 보여주고 저리 보여주다가 어디론가 다 사라졌다.
책을 집어 드니까 책 뒤에서 나온다. 깜짝 놀라키는 쇼다.
내 짐작이지만 지가 어디서 배웠겠는가.
지 에미가 가르쳐 줘서 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다.
피아도 연주하는 아이들이 가장 많았는데 한 소절만 친다.
만도린 키는 아이 컨추리 노래를 부르는 아이,
훌라후프를 돌리는 아이, 아이들은 보여주고 싶은 게 많다.
아이들은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잊어먹고, 잃어버리는 게 많다.
아이들이 벗어놓고 놀다가 잊어먹고 그냥 가는 바람에 학교에는 임자 없는 스웨터, 잠바
같은 겉옷들이 나뒹군다.
커다란 박스를 비치해 놓고 잃어버린 물건 찾아가는 곳을 지정해 놓았다.
그래도 찾아가는 아이는 별로 없는 모양이다.
오늘처럼 행사가 있는 날엔 한쪽에 쭉 펼쳐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옷들이 널브러져 있다.
오늘이 마지막 날로 집어가지 않으면 헌옷 도네이션하는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한다.
어린것들이 노는데 팔려서 잃어버리고 간 걸 보면서 잊고 지내던 나의 추억 한 토막이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던 어느 햇볕 따스한 봄날이었다.
엄마가 새 가죽 가방을 사줘서 메고 학교에 갔다. 한 두어 달쯤 다녔을 것이다.
어른들은 꾀라고 하지만 내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방을 메고 집에 갔다 다음날 다시 메고 올걸, 뭐 하러 메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가방은 내 의자에 놔두고 홀가분하게 맨 몸으로 집에 갔다.
엄마가 야단이 났다. 당장 학교에 가서 가방을 찾아오라고 했다.
터덜터덜 학교에 가 봤지만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 봐도 가방은 없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무실로 갔다.
여자 담임선생님이 가방을 주면서 가져가라고 하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몇 날 지나지 않아 6.25가 터졌다.
영희, 바둑, 순이 철수를 배우다가 말고 중단했다.
학교는 다니지 않고 맨 날 신나게 놀기만 했다.
대구로 피난 가서 2학년으로 들어갔다. 한반 학생이 백 명도 넘었고 교실도 없어서
야외 수업으로 대충 때우다가 한 달 만에 그만 뒀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일 년은 놀다가 3학년으로 들어갔다. 석 달 다니다가 4학년이 됐다.
놀기만 했지 학교에 다닌 날이 없다보니 4학년이 되도록 국어책도 온전히 못 읽던 생각이
난다.
다 늙은 지금 어린 것들이 노는 걸 보면서 나 어릴 때가 생각난다.
그리움인지 아쉬움인지 혼자 피식 웃는다.
비풍초
2019년 6월 13일 at 11:44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