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희의 ‘독박골 산 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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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소설도 사랑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연애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읽었다.
정신없이 살면서 세상 풍파 다 겪고 났더니 지금은 추억이 깃든 이야기가 좋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살던 지명이 등장할 때마다
디지털 영상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휴전을 전후해서 작가는 처녀시절이었고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지만 돈암동
동도 극장에서 영화를 본 건 같은 시점이었다.
작가는 애인과 함께 영화를 보았고 나는 동네 아이들과 화장실 지붕을 통해서 훔쳐(쎄배)
들어갔다. 안암내에서 아낙네들 빨래하던 거며 성북 경찰서 뒷골목 목욕탕까지 작가가
그리는 장면이 디지털 영상으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소설도 동질감을 느낄 때 더욱 재미있고 생동감이 살아난다.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미국을 배경으로 쓴 작품에서 공감대를 이룬다.
더군다나 교포가 쓴 글은 절절이 마음에 와 닿으면서 이해도 쉽다.
미주 한국일보를 거친 재미 소설가 권소희의 장편소설을 반갑게 읽었다.

권소희 작가의 칼럼을 미주 한국일보에서 몇 번 접하면서 글을 재미있게 잘 쓴다 했다.
이번에 장편 소설 ‘독박골 산 1번지‘를 출판했다기에 읽어보았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네를 그리워하며 쓴 소설이다.
불광동에서 구기 터미널로 넘어가는 길목에 독박골이 있었다.
지금도 지명은 존재하지만 등산로 어디에 그려져 있을 뿐이다.
작가가 기억하는 독박골 역시 전쟁이 끝나고 가난하게 살던 시절의 무허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산동네를 떠올린다.
그때는 서울에 집이 없어서 산이란 산에는 무허가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던 시절이다.
기억력은 시련을 좋아해서 추억을 더듬어보면 궁핍했던 시절에 겪었던 시련이 팔 활을
차지한다.

글에도 맛이 있어서 박완서의 글을 보면 디지털 영상을 통해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진다. 간이 잘 맞는 고깃국에 흰쌀밥을 말아먹는 맛이다.
권소희의 글을 보면 폴리쉬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구수한 고기 맛과 보라색 양파
맛이 따로따로 느껴지면서 머스털드 맛이 감미된 맛이다.
인상파 모네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작가의 글맛이 쏠쏠해서 2학년 4반 양미래의 독박골 시절에서 그 향기가 넘쳐난다.

작가가 말한다.
세상은 기억조차 생소할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달라졌다.
너무 빨라 정신이 아찔할 정도다. 새삼스레 아날로그 시절이 무슨 관심이 있을까 싶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촌스럽게 아날로그 시절의 일탈이 그립다.
도시 곳곳에서 재건과 개발의 움직임이 꿈틀거렸던 시절은 생명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기에 가난해도 마음이 병든 건 아니었다.
화가 나면 분에 못 이겨 묻지 마 폭행을 일삼는 무지막지한 지금의 일탈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쟁으로 쓰러져간 폐허 속에서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어른들의 허리를 낮춘 생활력과
정신력이 있었기에 학창 시절 방황해 봐야 골방에 모여 야외용 전축을 틀어놓고 방구들이
무너져라 고고 리듬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드는 거로 끝났는지도 모른다.
춤을 추다 보면 신기하게도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오! 수지 큐-

하루 중, 한 시간은 일산 교보문고에 들러 책꽂이에서 한 권 골라 그 자리에 서서 읽는다.
읽을 만큼 읽다가 꽂아놓고 온다. 다음 날 다시 꺼내 읽을 만큼 읽다가 다시 꽂아 둔다.
‘독박골 산 1번지’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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