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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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줌 강의에서 소설의 상상력을 공부 했는데……

이장욱의 소설 <고백의 제왕>에서 재미있는 진실 게임 부분만 추려 본다.

고백의 제왕이라는 것은 곽(郭)의 별명이었다. 동아리의 신입생 엠티 때부터 그런 별명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녀석은 그리 눈에 띄는 인상이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특이한 데가 있었다. 남방계통의 둥근 두상에 눈이 컸으나 두 눈의 균형이 좀 어긋나 보였다. 키는 평균치였지만 어깨가 좁았고, 말이 많지는 않았어도 목소리는 뭔가에 긁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친근감이 들지 않는 인상이라고 할까. 하지만 우리는 대학생활을 갓 시작한 새내기들이었고, 무엇보다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관대했다.

넓고 휑한 방에 모두가 둘러앉았을 때 누군가 진실게임을 제안했다. 몇몇이 찬동을 표하자 곧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소주병을 획 돌려 병이 가리키는 방향에 앉은 사람이 술래가 되었고, 술래는 질문에 따라 진실하게 고백을 해야 했다. 질문은 은밀한 것일수록 좋았지만 질문도 대답도 신입생들답게 아기자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키스는 언제? 남자친구는 몇 명이나 있었나? 가장 괴로웠을 때는?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나쁜 일은?
모두들 얼굴을 붉히며 고백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을 짝사랑했다거나, 현재 남자친구가 없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만들 예정이라거나, 고등학교 때 보충수업을 빠지고 아버지 주머니에서 슬쩍한 돈으로 오락실을 드나들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얼마 전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키스를 할 예정이라고 고백한 동료는 좌중의 웃음과 함께 가벼운 야유를 받았다. 자정을 넘기자 모두들 흥겨워졌다.
그때 소주병이 빙글빙글 돌다가 정지했다. 소주병은 곽을 가리켰다. 곽은 저녁 내내 말이 없던 동기 중 하나였다. 곽이 일어나자마자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첫 경험은 있나요? 있다면 언제? 까르르 웃음이 흩어졌다. 짓궂긴 했지만 상투적인 질문이었다. 에이, 그건 아까도 나왔던 질문인데? 누군가 질문자에게 가볍게 항의했지만 이미 모두의 시선이 곽에게 쏠린 뒤였다.
곽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곽에 대한 우리 모두의 기억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아, 아, 처, 첫 경험이라면, 주, 중학교 삼학년 때입니다.
환성이 터졌다. 와, 누구란? 어디서? 곽이 더듬더듬 고백을 계속했다.
주, 중학교 때 집에서 식당을 했어요. 하, 함바집이었는데,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 밥을, 밥을 대주는 일이었습니다. 사, 삼치구이가 인기였어요. 두툼하고 신선한 생선을 썼기 때문에 맛이 최고였는데……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중에 곱상한 분이 있었어요.
모두들 숨을 죽였다.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뜻밖에 달변이었다. 모두들 이야기에 몰입했다. 세세한데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곽의 고백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날 밤 곽은 식당에 남아 혼자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돕게 되었다고 한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내일 쓸 식재료들을 다듬어 두는 일이었다. 무와 대파 등속을 썰어놓고 털 뽑힌 닭을 솥에 넣어 고느라 주방은 무덥고 어지러웠다. 초복이었다. 곽은 후끈 달아오른 주방에서 아주머니를 도와 일하다가 아주머니의 투실투실한 허벅지를 보게 되었다. 땀을 닦는 아주머니의 젖가슴이 흔들리는 걸 곁눈질한 것은 물론이다. 솥 안에서는 중닭 여남은 마리가 펄펄 끓고 있었다. 주방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어느 결에 곽의 손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곽의 손이 아주머니의 허벅지에 닿은 것이 먼저였는지 아주머니의 손이 곽의 사타구니에 닿은 것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곽과 아주머니는 어느새 엉켜 있었다…… 그런 내용이었다.
생각해 보면 화장실 낙서에서나 볼 만한 내용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곽의 묘사가 자세하고 자연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생동감이 넘쳤기 때문이다. 곽의 표정 역시 인상적이었다. 뭔가 어긋나 보이는 곽의 눈매가 조금씩 꿈틀거릴 때마다 우리 모두의 상상력이 자극되는 느낌이었다. 그의 표정은 말과 혼연일체였다. 곽의 이야기가 너무 세세하고 적나라한 나머지, 동기생 하나의 입에서 긴 침이 흘러내리던 광경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곽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 끝에 여자 선배 하나가 손을 들어 호기롭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연세가 어느 정도셨나요?
곽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조금은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게…… 환갑을 좀 넘기신 분이었어요. 아주머니가 옷을 입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폐경이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사실 전 폐경이 뭔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폐경이 뭔지 알게 되었을 때는……
좌중은 더욱 조용해졌다. 곽이 무심결에 덧붙이듯 말했다.
……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그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지나갔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곽이 자리에 앉고 나서 좌중은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진실 게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선배 하나가 탁탁 손뼉을 치며, 자아, 이제 술이나 마시지, 하고 선언하듯 외쳤을 때에야,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는 엠티 온 풋풋한 대학 새내기들이 되어 다시 왁자해졌지만, 곽의 그 고백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곽의 1차 고백에 불과하다. 2차 고백에서 곽은 가짜 학생이었다. 3차 고백으로 같은 동아리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 J가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이 곽의 고백에 의하면 곽이 임신시켜서…….
이제 고백이 끝났나 했더니 드디어 4차, 5차 고백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곽이 과연 ‘고백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력의 무한대를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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