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LA에 가느라고 루시와 햄스터를 우리 집에 맡기고 갔다.
딸은 애완동물을 좋아해서 어려서도 개며 토끼, 햄스터를 길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시만 있었는데 언제 햄스터를 사왔는지 모르겠다.
딸은 동물의 세계를 지켜보는 걸 재미있어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식에게까지 자기 취향을 전수해 줄 게 뭐람.
햄스터는 손주가 기를 거라도 했다.
햄스터라는 게 내가 보기에는 생쥐와 다른 점을 모르겠다.
다람쥐 케이지 같은데 가둬놓고 먹이를 주는데 낮에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햄스터가 손주 녀석이 아끼는 동물이어서 할머니에게 맡기면서도 주의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밤이면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려 싸서 시끄럽단다.
아닌 게 아니라 밤에 불을 다 껐더니 이상한 소리가 요란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찾아봤더니 햄스터가 쳇바퀴 돌리는 소리다.
쥐라는 놈은 밤에 활동하는 동물이 아니더냐.
어디를 그리 바쁘게 달려가는지 있는 힘을 다해, 쉬지도 않고 달린다.
네가 달리는 것까지는 좋으나 시끄러워서 살겠니.
날이 더워서 문을 열어놓고 잤으면 딱 좋겠는데 햄스터 달리는 바람에 문을 꼭 닫고 자야
했다.
루시는 또 얼마나 가관인가. 루시는 딸네서 기르는 알래스카 허스키의 이름이다.
루시 나이가 15살이니 사람으로 치면 팔십 고령이 되겠다.
눈이 먼 건지, 노안이 깊은 건지 앞을 보지 못한다.
데려다 놓으면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비실댄다.
딸의 말로는 눈이 멀었다고 하는데, 눈먼 개는 처음 보았다.
눈이 멀었으니 운동은커녕 걷지도 못한다.
뒷마당에 데리고 나가봐야 그저 멍하니 서 있다가 몇 발짝 움직일 뿐이다.
딸은 루시를 맡기면서 지가 LA에 다녀오는 동안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갑자기 루시의 운명을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말에 찔끔했다.
오줌을 눕히려 밖으로 끌고 나가면 억지로라도 들락거리는 거로 봐서 금세 죽을 것 같지는
않다. 아내는 루시가 귀가 먹어서 짓지도 못한다고 했다.
눈도 멀었고, 짓지도 못하는 루시의 앞날이 뻔한 것 같아서 안락사라도 시켜 주는 게 옳지
않겠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다.
아내와 나는 루시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였다.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서 뭐 달라질 거야 없겠지만 언제라도 죽을 것 같아서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에 루시의 죽음을 맞는 건 아닌지 두렵다.
어서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손주가 태어났을 때 이미 루시가 있었다.
딸이 갓난아기를 안고 모유를 먹이면 루시가 질투했었다.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루시가 사랑을 빼앗긴다는 것을 인지했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동물이나
사람이나 느낌이 서로 통하는 모양이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은 일이 있었다.
원래 개는 집 밖에서 기른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개가 죽었다고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새 아이들은 집 안 같은 공간에서 지내던 생명이 죽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기도
한다. 정든 루시가 죽는다면 손주의 마음에 품고 있는 소중한 무언가도 함께 무너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죽는다는 것은 죽는 순간의 이미지로 남아있기 마련이어서 나의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므로 어머니의 이미지는 늘 젊은 여인으로 남아있다.
오늘이라도 루시가 죽는다면 루시의 이미지는 늙은 개로, 그것도 눈멀고 귀 멀고 짓지 못하는
개로 남을 것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알겠지만, 생명이라는 게 그리 쉽게 끊어지지는 않으리라.
이층에서 아침 먼동이 트는 광경을 내다본다.
나지막한 산 넘어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 온다.
엊그제는 안개가 끼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더니 오늘은 둥근 해가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태양은 곧 생명이요, 생명은 우리에게 또 다른 활기를 불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