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수의 소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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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운동삼아 일산 호수를 향해 걷는다.

4,000보를 걸어가면 호수의 애수교가 나온다.

오랫동안 못 봤더니 조금 달라졌다. 다리 위에 없던 홍살문도 두 개나 세웠다.

홍살문은 내가 붙인 이름이고 실은 일본식 토리이 기둥 문 같은 인상을 풍긴다.

지난해에 다리를 수리했다더니 변한 건 홍살문을 세운 것뿐이다.

내가 애수교까지 걸어가는 이유는 애수교 밑에 잉어가 있기 때문이다.

잉어를 보러 멀리 애수교를 찾는다.

 

잉어는 언제 보아도 반갑다. 잉어 역시 나를 반겨주었다.

숫자가 예전처럼 많지는 않아도 디륵디륵 살이 찐 건 여전했다.

살이 너무 쪄서 뒤뚱거린다.

물속에서도 살이 너무 찌면 동작이 둔하고 뒤뚱거릴 수밖에 없다.

먹이를 많이 줘서 살이 찐 게 아니라 운동 부족으로 찐 살이 분명하다.

놀고먹는 게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먹이 사냥을 필요로 느끼지 않는 잉어는

운동 부족으로 살이 너무 쪄서 잉어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었고 곰탱이처럼 둔한 게 징그럽게 보인다.

 

잉어 구경하기에 딱 좋은 작은 나무다리를 누가 애수교란 이름을 붙였을까?

애수[哀愁]는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슬픔이나 시름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슬프다는 이야기다.

애수 하면 애수의 소야곡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가수 남인수가 불러 히트 친 노래이기는 하지만 노래의 역사를 내가 알리는 없다.

다만 나의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노래임으로 나도 저절로 부르게 된 노래이다.

애수의 소야곡이 1937년 말에 발표되었다고 하니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기 7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시집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행했던 노래일 것이다.

전 국민의 애창곡이었으니 나의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즐겨 불렀으리라.

어머니의 젊은 시절, 25살을 전후해서 유행하던 노래였으니 얼마나 민감했을까.

애절한 마음으로 즐겨 불렀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 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가수 남인수의 맑고 애처로운 미성으로 부르는 애수의 소야곡은 당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았으리라. 거기에다가 쏠로 기타 반주가 목소리를 돋보이게 밭쳐주었으니.

가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이 한 층 더 애간장을 태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도,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하면서도 혼자서 노래를 즐겨

부르셨는데 애수의 소야곡은 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 바람에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 익히게 되었다.

애수의 소야곡은 모임에서 들어보라고 부를만한 노래가 아니다.

놀러 가서라든가, 술좌석에서 부르는 노래도 아니다.

애수의 소야곡은 나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혼자서 부르는 노래다.

누구 들어보라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속으로 흥얼대는 노래이지만 노래를 부르면

만감이 교차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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