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도장 찍고 뒤돌아서 걸어가는 여인처럼

IMG_2-13

 

썸머 타임이 해제되고 난 후로는 날이 금세 어두워진다.

어제저녁엔 겨우 5시인데 밖이 깜깜해서 지레 겁먹고 운동길에 나가지 못했다.

오늘은 벼르다가 일찌감치 나섰다.

일찍 나섰건만 외로운 가을 해는 서둘러 넘어간다.

산머리에 걸쳤나 했더니 내가 바라보든 말든 제 갈 길만 간다.

일몰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기는 내가 늙고 나서의 일이다.

 

봄날 같았으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도 한동안 자투리 빛으로 환했건만,

가을 해는 그렇지 않았다. 외로워서 그런지 싸늘하기가 칼날 같다.

칼날같이 싸늘한 공기는 신선한 느낌마저 든다.

호수 자락을 스치고 지나온 싸늘한 바람에 산소가 가득하다.

신선한 산소가 폐에 좋을 것 같아서 심호흡으로 마음껏 마셨다.

한국에는 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됐다면서 호흡기 환자, 노약자는 외출을 자제해 달라는

부탁이다.

살다 보니 공기도 맘 놓고 마시지 못하는 세상이 되다니?

 

길을 건너가려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건너가는 길목에 다다르려면 아직 대여섯 발작은 더 남았는데 달려오던 차가 멀찌감치

멈춰서서 내가 먼저 건너가기를 기다린다.

민망하고 송구스러워서 오른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표했다.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말하리라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붉고 곱게 물든 노을을 즐기고, 아름다운 마음씨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

! 나는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하늘에는 독수리과 버쳐(Vuture)가 고공비행하다가 잠자리처럼 멈춰서서 저녁거리를 찾는다.

바싹 마른 풀밭에 들쥐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다.

적게는 대여섯 구멍이 몰려 있고 많게는 떡시루 바닥 구멍처럼 여럿이다.

각각의 구멍으로 들어가 봐야 땅속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 만나리라.

들쥐들이 많은 구멍을 뚫어놓는 이유는 공중에서 버쳐가 공격해 오면 잽싸게 가장 가까운

구멍으로 피신해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생사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들쥐도 가족이 있는데 가족이 함께 들에 나왔다가 먹잇감만 노리던 버쳐의 공격이라도

받게 되면 식구들이 각자 흩어져서 구명으로 들어가 피신해야 한다.

구멍이 여럿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들쥐들이 터득한 생존의 지혜가 엿보인다.

 

공원 개방 시간은 일몰까지라는데 미처 공원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어둡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깜깜해지고 말았다.

외로운 가을 해는 봄 해와는 달라서 내일 다시 만나자는 인사 나눌 시간도 주지 않고

냉정하게 넘어갔다. 마치 이혼 도장 찍고 뒤돌아서 걸어가는 여인처럼.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