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낭독을 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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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예총 작가회의 여러분한테서 연락이 왔다.

나야 처음이라서 생소하지만 일하시는 분들은 열심히 움직였다.

38회 작가회 동인지 출판기념회가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다가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식순에 따라가다가 시, 수필 낭독이 있고 소설 낭독은 나의 몫이라고 했다.

대답은 해 놨지만, 소설 낭독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알지 못하니 걱정이 앞섰다.

 

언제인가 유명한 소설가 이영하 작가가 라디오에 출연해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중국 청화대에서 열린 한중 문학 교류에 참석했던 이야기다.

대학교 강당에 학생이 많이 모여 앉아 있는데 자신은 맨 앞줄에 앉았단다.

한 여학생이 무대에서 이영하 자기 소설을 낭독하는데 하필이면 소설 내용 중에서

가장 리얼한 사랑 부분을 읽더란다. 작가 자신이 듣는데도 얼굴이 화끈하더라는 이야기였다.”

시나 수필 낭독은 들어봤으나 소설 낭독도 한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이영하 작가의 이야기를 참고삼았다.

소설 낭독은 재미있는 한 부분을 떼어내서 읽으면 될 것이다.

지난해에 당선한 장편 소설 소년은 알고 싶다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어딘지

생각하다가 첫사랑을 만나는 장면으로 정했다.

A4 용지에 옮겼더니 3장 분량이다.

작가회에서는 여러 차례 식순을 환기하는 연락이 왔다.

준비한 분량이 3장 정도라고 했더니 너무 많다고 한 장 분량으로 줄여달란다.

한 장 분량이라면 첫사랑 만남의 이야기를 꾸겨 넣을 수가 없었다.

방향을 바꿨다. 첫사랑과 헤어지는 장면을 읽기로 했다.

 

『물길을 가로막은 길고도 먼 둑을 따라 알록달록한 코스모스가 엷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가냘픈 코스모스들은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듯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가을 햇볕이 따사한 호숫가 코스모스밭에 앉았다.

 

추 양은 수줍은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볼까 하는 생각에 나는 작은 부케를 만들어볼

작정이었다. 흰색, 옅은 분홍색, 빨간색 코스모스를 꺾어서 작은 다발을

만들고 밑동을 풀줄기로 묶어 맸다.

즉석에서 만든 부케를 추 양에게 건네주었다.

추 양이 함박웃음을 띠며 좋아하는 모습이 철부지 아이처럼 순진해 보였다.

가을 공기가 맑고 신선했다. 같이 앉아만 있어도 즐겁고 행복했다.

흙색 메뚜기가 길섶으로 날아갔다.

 

나는 별로 묻고 싶은 게 없는데 추 양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추 양은 기분이 들떠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심심해할까 봐 그랬는지,

옆에 붙어 앉아 내 팔을 끼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랬다가도 금세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모닥불처럼 피워댔다.

고향이 원주라는 것도,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딸이 여섯인데 자신이 막내라는 것도,

형부가 원주시청에 다닌다는 것과 형부가 병무청에 취직시켜주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병무청이 원래는 원주에 있었는데 춘천으로 이사 오는 바람에 자신도 따라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말없이 심심해하는 게 자기 탓인 양 어떻게 해서라도 지루하지 않게 해주려고

열심히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기엔 아직 갈 길이 먼데, 추 양은 이미 꿈을 그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나는 그냥 사귀어보자는 생각이었으나 추 양은 연애나 하자고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나는 사랑하면서도 늘 경계해야만 했고 덜컥

겁도 났다.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잘못하다가 추 양을 실망하게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사랑은 약속을 요구한다. 사랑이 너무 일찍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등과 번민이 뇌세포를 쥐어짜는가 하면 가슴에는 불길이 일었다.

어디선가 한번 읽었던 법문이 떠올랐다.

 

“제자가 부처님께 묻기를 ‘같은 일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니 무슨 연유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이룰 수 없는 일에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룰 수 있는 일에 온 힘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중생인 나로서는 이룰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고 이룰 수 없는 일이 어떤 것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났다. 만나면 달콤하고 행복했다.

사랑은 맨발로 모래사장을 밟는 것처럼 부드럽고, 간지럽고, 감미로웠다.

자석과 같아서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해 겨울은 짧았다. 봄이 되려면 아직도 긴 겨울이 남아 있는데

나는 카투사로 발령이 나서 병무청을 떠나야 했다.

카투사로 간다는 소문은 금세 청 내에 퍼졌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쉬움이 뒤섞여 다가왔다.

 

추 양에게서 곱게 포장된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앨범을 선물로 받고 나서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 잡은 손을 끌어당겨 힘껏 부둥켜안았다.

가슴에 와닿은 추 양의 머리에서 샴푸 향이 풍겼다.

큰 북채로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나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우리는 부둥켜안은 채로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건 내 생각인데 모임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듣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낭독한 것을 기억이나 하겠는가?

들을 때뿐이지 듣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간혹가다가 잊히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성우 김세원처럼 기름기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찰싹 달라붙게 읽는다면

듣는 이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감명받는 경우이다.

세상에 난생처음 낭독이라는 걸 하다 보니 생뚱맞은 성우 김세원의 목소리가

부럽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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