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서 바라보는 함박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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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게 추운 겨울날 아침이다.

희뿌연 구름에 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해라는 윤곽을 드러내 보이면서 조금이나마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오는데 밖에는 눈발이 날린다.

그냥 눈발이 아니라 몹시 날린다.

희미한 해와 눈발이 어울리면서 누가 이기나 경쟁이라도 하듯이 내 눈에 비친다.

눈도 지지 않으려고 거침없이 눈발을 날려 보낸다.

금세 도로에 눈이 쌓였다. 주차장이 하얗게 눈으로 덮였다.

 

잠시 멎었나 했더니 정오가 되면서 다시 눈은 쏟아졌다.

하늘은 온통 희뿌연 잿빛으로 변했고 눈은 쉴새 없이 날린다.

태양과 눈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눈은 기세를 몰아 제 세상이나 만난 것처럼

인정사정 보지 않고 쏟아부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서 눈이 날렸다.

창밖을 내다보는 내내 마음은 설레고 기분은 들떴다.

늙은 날의 눈 날리는 정경은 그저 보고 즐기는 게으름으로 만족했다.

 

14층에서 내다보이는 창밖은 땅이 없는 허공에 눈만 가득하다.

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희뿌연 하늘에 온통 눈뿐이다.

눈이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눈은 희고 굵지만, 민들레 홀씨보다 가벼워서 이리저리 춤을 추듯 날린다.

버선발의 춤사위가 아름답듯 눈 춤도 아름답다.

춤도 지리박이나 탱고가 아닌 한복 입은 여인의 춤이다.

장단에 맞춰 덩실덩실 날아다닌다.

눈이야말로 한겨울 차가운 날씨에 망사 같은 차림새에 춥지도 않은 모양이다.

춤추는 눈이 쌓였으니 눈 쌓인 뜰도 아름답다.

금세 세상을 하얗게 바꿔놓고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마술사 같은 눈.

눈은 춤을 추며 날리니까 아름답다.

14층에서 바라보는 눈 날리는 광경은 정말 진풍경이다.

 

미국에서는 맨땅에 지은 집에서만 살다가 한국에 들어오면 14층 높은 집에서 산다.

땅에서 살 때와 공중에서 살 때의 느낌은 다르다.

땅에서 살면 창밖이 수평으로 보인다. 나무가 자라고 새가 날아간다.

늘 보아오던 모습이라서 그러려니 한다.

밖에 나가고 싶으면 문 열고 나가면 곧바로 땅을 밟는다.

땅만큼 믿을만한 게 세상 어디에 있을까?

땅을 밟으면 모든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편안하다.

 

14층에서 살면 창밖이 낭떠러지다.

세상은 저 밑에 있고 나는 공중에 떠 있다.

자동차며 사람, 나무들이 저 밑에서 조그맣게 보인다.

사람과 자동차가 장난감 움직이듯 천천히 기어간다.

내가 보이지 않는 신이 된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불안하거나 무섭지는 않다.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이나 지장은 없지만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엊그제 함박눈 날리던 날, 14층에서 바라보는 눈 날리는 모습은 눈이 허공에

꽉 찬 광경이었다.

하지만 땅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볼 때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뻐했다.

 

오늘 아침엔 창밖에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자욱한 허공은 아름답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다.

아침나절 비둘기 20여 마리가 저 밑 허공을 떼지어 날면서 이리저리 휘졌고 날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라진 비둘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침침한 안개는 비둘기의 먹이 활동을 가로막았다.

땅은 흙이고 흙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준다. 인스턴트 먹이가 아니라 진짜 먹이를.

14층 집은 공간이고, 땅을 밟고 서 있는 집은 그냥 집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우린 공간도 집이라는 착각 속에서 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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