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뒷마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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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내 눈에 띄기로는 이번이 두 번째다. 캘리포니아 회색 여우다.

여우는 야생동물이어서 덩치가 작아도 섬뜩하다.

햇볕 따스한 양지쪽에 앉아 오수를 즐긴다.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려는 모양이다.

나는 첫눈에 알아봤다. 저것이 여우라는 것을.

 

몰래 아내를 불러 보라고 했다.

아내는 처음 보는 여우가 믿기지 않는가 보다. 라쿤(너구리 과)이라고 했다.

라쿤은 야행성 동물이다. 밤에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도 하고 먹잇감인 지렁이를 찾느라고

잔디밭을 들쑤셔 놓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동물은 여우가 맞다. 캘리포니아 잿빛 여우다.

 

수일 전에도 한 번 보기는 봤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어서 여우같은 동물이 뒷마당에 왔다 갔다고 했더니 아내는 여우가

아니라고 우겼다. 보지도 못했으면서 믿으려 들지 않았다. 개나 고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분명 개나 고양이는 아니었고 라쿤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주둥이와 꼬리를 보고 여우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여우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몸집이 날렵하게 생겼고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야성이 그대로 살아 있다.

 

오늘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여우를 본다.

비록 야생에서 사는 동물이지만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회색 털로 잘 단장한 몸매가

멋을 한껏 부린 애완동물 같다.

특히 짙은 회색 긴 꼬리는 털이 풍성하면서 그 밑으로 엷은 털이 덥수룩하지만

반지르르한 게 조선기와 추녀처럼 치켜들고 있는 것이 차밍하다.

과연 여우 꼬리는 탐이 날 만큼 토실토실해 보였다.

꼬리가 몸체에 비해서 과분수로 길고 큰 까닭은 뛰어 달리는 동안 긴 꼬리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덕분에 정확성과 균형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마치 꼬리가 부력(浮力)과 같은 역할을 한다.

 

기왕에 내 집에 온 여우라면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를 바랐지만,

여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에 쫒기는 것도 아니면서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황급히 가 버렸다.

영리하고 교활한 여우가 마치 약속이나 하고 헤어진 것처럼 나는 다음 만날 날을 기다린다.

총명하고 귀여운 여우를 기다린다.

 

여우가 여러 날째 빠짐없이 뒷마당에 나타났다.

여우는 왜 우리 집에 와서 낮잠을 즐기려는 걸까?

여우도 얼마나 살기에 힘들고 고달프겠는가?

먹이가 거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마음 놓고 편히 다닐 수 있게끔 사람들이 놔두지도 않는

환경에서 그날그날 살아간다는 것은 아마도 전쟁터를 거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쌓인 스트레스도 풀 겸 잠시 쉬었다 가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여우가 뒷마당을 드나든 지 여러 날 됐다. 이왕에 우리 집 뒷마당을 제집 드나들 듯

오고 가는 여우인데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우라는 이름이 좀 얄궂어서 그렇지 차근차근 살펴보면 예쁘고 귀엽다.

여우를 볼 때마다 긴장되고 초조하면서도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라는 엉뚱한 마음은

왜 생기는 걸까?

 

엣세이 집 <미국이 적성에 맞는 사람, 한국이 적성에 맞는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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