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세월 가는 대로 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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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서재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지면서 드문드문 이웃의

지붕들이 보이는가 하면 멀리 산마루가 길게 이어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언덕 밑 집 뒷마당에 우뚝 선 구척장신 미송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 뒤로 전경이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뒷집에서 미송을 베어버린 것이 내게는 행운으로 다가왔다.

앞이 활짝 열리면서 시원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송이 사라진 후로 나는 창문을 자주 연다. 훤히 트인 경치를 즐기기 위해서다.

창밖을 내다보면 날씨가 좋은지, 바람이 부는지, 얼마나 세게 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흰 구름이 드문드문 떠 있지만, 그런대로 맑은 편이어서 하늘엔 파란색이 더 많은

아침이다.

가끔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바람이 일다 말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요새 행복해서 죽겠다.

사람이 행복하면 보이는 것이 모두 사랑스럽게 보인다. 문밖에 나서자마자

앞집 멕시칸 후리오가 “Joe”하고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손을 흔드는 것도,

동네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반갑다고 손을 들어 인사하며 지나가는 것도

모두 나를 즐겁게 해 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걷기 운동 나갈 요량으로 2층에서 내려오면 쉐이디는 내가 좋다면서 두 앞발을 번쩍

들고 반기는가 하면 꼬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어서 나가자고 졸라댄다.

개가 나를 보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말 못 하는 짐승일망정 정을 주고받기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개는 한번 주인으로 섬기면 주인에게 충성을 다 한다.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면서 주인을 따른다.

오직 충성밖에 모르는 개가 주인이 목줄을 잡고 걸어가니 개인들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개가 행복해서 뛰는 심장의 전율이 목줄을 타고 내게 전해 온다.

 

햇살이 눈 부신 아침이다.

동네 한 바퀴 돌아오는데, 빠르면 30분 조금 느슨하게 걸으면 5분 정도 더 걸린다.

걷다 보면 딱 중간쯤에 집수리 공사 중인 빈 집이 있다.

집수리라고 해서 간단하게 고치는 게 아니라 아예 집을 다 헐다시피 해 놓고

새로 짓는 식이다.

나는 이 길을 10년도 넘게, 아니 그보다 더 훨씬 전부터 걸어 다녔다.

그때도 이 집은 수리 중이었다. 자그마치 20년도 넘게 수리 중이다.

무슨 집수리를 그렇게 오래 하느냐 하겠지만 미국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어느 날엔가는 집수리가 끝날 것이다. 그때쯤이면 집수리하던 사람도 은퇴할 것이고

수리가 끝난 집은 팔아서 은퇴 자금으로 쓰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20대 때 샌리안드로에서 살았다. 그때도 한동네에서 사는 미국인이

뒷마당에서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 배라고 해서 작은 배가 아니라 제법 큰 배를

그것도 철근으로 건조했다. 매일 달라붙어 일하는 게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혹은

심심할 때면 달라붙어 일하곤 했다. 은퇴하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것이라고 했다.

자그마치 30년은 지났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그 동네에서 이사 나왔고 두 번은 더 옮겨 다녔다.

어느 날 지나다가 옛날 그 동네에 가 보았다. 건조하던 배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배 건조는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고 배 주인은 은퇴해서 지금쯤 어느 바다를 누비고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스스로 한국인들이 얼마나 서두는지 모른다. 뭐든지 조급하다.

미국에서 오전에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서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나가 버리는 사람은 한국인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기다리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얼마나 많이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밑지는 것 같았다.

다 살고 난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조급하게 살 필요가 있었을까?

인생은 외길이고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건데 천천히 간들 땅이 꺼지겠는가?

 

은퇴하고 집에서 머문 지도 10년이 넘었다.

시간을 지켜야 할 일도 없고 설혹 일이 있으면 다음 날로 미뤄두고 느긋하게 지낸다.

느슨하게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느슨한 게 얼마나 여유롭고 행복한지 모른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과자가 생기면 먹고 안 생기만 안 먹고, 그냥 세월 가는 대로 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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